댜오위다오는 옛 부터 중국의 영토였다 | ||||||||||||||||||
국가도서관 대량의 역사 문헌자료 증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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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국가도서관은 ‘댜오위다오관련 소장문헌 정황 설명회’를 열고 많은 취재 진들에게 수십 종의 댜오위다오 및 부근 도서 관련 고서적과 지도 등 역사문헌 자료를 공개 전시했다. 댜오위다오를 장기간 관할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중국이 먼저 발견하고 댜오위다오라 명명해 이용했다
명조 홍무(明洪武)5년(1372년) 명태조 주원장이 양재(楊載)를 파견하여 유구(琉球)를 출사하도록 했다. 또 즉위건국(卽位建元)을 명백히 지시했으며 찰도유구왕(察度琉球王)으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유구왕은 중국 황제로 책봉 됐다. 중국 역사상 명청(明淸) 두 시대의 조정은 잇따라 24차례 유구왕국에 책봉사절을 파견하였으며 대량의 ‘사유구록(使琉球錄)’을 남겼다. 사유구록에 유구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또한 댜오위다오 및 부근 도서가 중국 영토에 속한다는
역사사실을 기록했다. 원년 (1403년)의 ‘순풍상송(順風相送)’이다. 그 속에는 ‘댜오위다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천칸(陳侃)의 ‘사류구록’(1534년)은 현존하는 역사문헌 중 가장 오래된 중국과 유구 해상 강계(疆界)관련 중국 정부 측 문헌이다. 문헌에는 “댜오위서(釣魚嶼)를 지나고 황모서(黃毛嶼)를 지나 적서(赤嶼)를 지나노라면 볼거리가 너무 많아 눈이 모자랐다… 구미산(古米山)까지도 여전히 유구에 속하 더라” 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유구인들은 댜오위다오
열도를 지나 구미산(오늘날 오키나와 久米島)에 도착해 귀국한 것으로 여겨지며 댜오위다오는 중국의 영토에 속했다. (使琉球雜錄)’(1683년), 서보광(徐保光)의 ‘중산전신록(中山傳信錄)’(1719년)에 그려진 ‘류구36도도(琉球三十六島圖)’및 ‘유구지도(琉球地圖)’, 주황(周煌)의 ‘유구국지략(琉球國志略)’ (1756년), 반상(潘相)의 ‘유구입학문견록(琉球入學 聞見錄)’(1764), 이정원(李鼎元)의 ‘사류구기(使琉球記)’(1802년)등 사료에는 모두 댜오위다오가 중국의 영토라고 기록됐다.
■중국은 댜오위다오를 오랫동안 관할해 왔다
명조 동남연해 주둔방위 최고 장군인 호종헌(胡宗憲)과 지리학자 정약증 (鄭若曾)이 편찬한 ‘주해도편(籌海圖編)’(1562년, 사진1)에는 댜오위다오 등 도서를 ‘연해산사도(沿海山沙圖)’에 그려 넣고 중국영토 방위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는 중국이 댜오위다오에 대해 해당 관할권을 실행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 이다. 정순공(鄭瞬功)의 ‘일본일감(日本一監)’(1555년)에는 “댜오위서는 소동 소서(小東小嶼)이다”고 기록돼 있다. ‘소동’은 당시 타이완에 대한 별칭이다. 이는 그때 중국은 이미 지리적인 관점에서 댜오위다오를 타이완의 부속 도서 라고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원이(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1621년), 명조 말기의 시영도(施永圖)의 ‘무비밀서(武備秘書)’는 ‘주해도편(籌海圖編)’을 인용하며 댜오위도를 해군 순찰 감시 방위범위로 기록했다. 이는 명조가 댜오 위다오에 대해 지속적인 관할을 진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속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범함(范咸)의 ‘重修臺灣府志’(1747년)에는 댜오위다오 등 도서가 타이완 해역 방위범위에 속했다고 기재돼 있다. 진수기(陳壽祺)의 ‘重纂福建通志’(1871년)는 댜오위다오 등 도서를 타이완 이란(宜蘭)현의 해상 방위 요충지로 기록했다. 추세태(鄒世殆)의 ‘皇朝中外一統輿圖’(1863년)는 구미산(姑米山)을 유구의 국경선으로 지정하여 댜오다오, 황웨이위(黃尾嶼), 츠웨이위(赤尾嶼)를 중국 영토로 귀속시켰다. 민국 34년(1945년) 3월, 내정부 지도 발행허가를 얻고 중국사지도(史地圖)편찬사가 출판한 ‘中韓日形勢圖’에는 댜오위다오, 황웨이위, 츠웨이위의 지리위치를 명확히 표기하고 이런 도서(島嶼) 들이 중국의 영토라고 밝혔다.
■일본이 출판한 지도에는 중국의 댜오위다오가 포함돼 있지 않아
설명회에서는 또한 홍콩 중문대학 정하이린(鄭海麟)박사가 제공한 일본 본국에서 출판한 지도인 ‘대일본전도(全圖)’(1876년, 사진2), ‘일본지도’(1967년, 사진3)를 전시했다. 이런 지도들에는 중국의 영토인 댜오위다오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또한 정박사가 제공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국가들이 19세기에 출판한 ‘중국지도’를 전시했는데 이런 지도들에는 모두 중국의 영토 댜오위다오가 포함돼 있었다. 실린 댜오위다오 관련 중국 외교부의 성명 등 자료를 전시했다. 했으며, 타이완의 부속 도서로 관할하며 중국 해역 영토에 귀속시켜 해상 방위를 실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절대 주인 없는 섬’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명치(明治)정부는 1885년 오키나와 현당국의 조사를 거쳐 무인도를 발견 하고 1895년에 일본 영토에 편입했다. 일본이 개념을 살짝 바꿔 ‘무인도’를 ‘주인 없는 섬’으로 바꿔치기하고 이른바 ‘선점(先占)’근거 원칙으로 댜오위 다오의 ‘주권’을 취득하려는 논법은 순전히 역사 날조이다. 19세기 말에 일본이 중국영토인 댜오위다오를 훔쳤든 아니면 1970년대 美日이 댜오위다오를 두고 밀실거래를 했든 중국에 속한다는 사실을 개변할 수 없다. 본보 베이징 9월 17일 보도:기자 판옌시(潘衍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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