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薄熙來)는 끝났다. 그러나 중국 권력 투쟁의 2막은 오는 10월 제 18차 당대회를 앞두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 사태를 계기로 중국 권력층의 계파 구도도 무너졌다는 분석이 많다. 전문가들은 중국 권부에서 진행 중인 물밑 투쟁을 바라보며 “차기 권력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자기 사람을 심는 것만 남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보의 몰락은 가족의 날개 없는 추락뿐 아니라 함께했던 가신(家臣) 그룹의 몰락을 불러왔다. 중국 권력자들에게 있어 살아남는 일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가 갈수록 거세지는 이유다.
◆ 향후 권력, 당 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봐라 = 중국 최대 권력의 실세는 국가주석이 아니다. 당 군사위 주석이다. 당, 행정부, 군이 사실상 완전히 분리돼 있지 않은 중국에서 실질적인 권력 제1인자는 인민해방군을 통솔하는 군사위 주석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주석에게 국가주석직은 물려줘도 군사위 주석직은 2년이 지나 겨우 물려줬다. 따라서 후진타오가 과연 어느 시점에 군사위 주석직을 차기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에게 넘겨줄 것인가가 중국 권력이양의 핵심 변수라고 할 수 있다.
군사위 주석을 보조, 견제하는 군사위 부주석직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도 관심사이다. 일단 후 주석이 관례에 따라 최소 2년간 군사위 주석직을 보유한다면 시진핑은 부주석에 머물러 있게 된다. 군사위 부주석은 현재 시진핑을 비롯해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 등 총 3명이다. 문제는 시진핑이 군사위 부주석에서 주석이 된 후 그 자리에 과연 자기 사람을 앉힐 수 있을 것인가 여부이다.
후 주석은 2004년 뒤늦게 군사위 주석직을 물려받고 자신의 부주석 자리에 심복인 쩡칭훙(曾慶紅)을 앉히려 했지만 장쩌민의 사람으로 알려진 쉬차이허우에게 물려줘야 했다. 2007년 군사위 부주석이 3명에서 2명으로 줄었지만 후 주석은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했다. 2010년이 돼서야 시진핑이 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현재 중국 지도부 간 가장 치열한 다툼은 바로 누구의 인맥이 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이어 가느냐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차기뿐 아니라 차차기에 대한 지분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도 봐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9개 보좌(寶座)’라 불리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9자리는 현직인 시진핑, 리커창(李克强) 등을 비롯, 총 11명의 후보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9자리의 서열과 그 밑자리 인물 선정을 놓고 물러나는 이들이 치열하게 각자의 지분을 챙기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계파가 무너졌다? = 사실 중국에서 공청단(共靑團)이니 상하이(上海)방, 태자(太子)당이니 하는 것은 그 출신에 따른 편의상 구분이었다. 중국이란 전통상 출신이 비슷한 이들끼리 더 가깝고 뭉친다는 가정에서 만들어진 계파 분류였다. 그러나 이런 계파 구분은 보시라이 사건을 보면서 조금씩 그 틀이 깨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건 전개의 득실이 계파 간의 득실과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초 보시라이가 건재했을 때만 해도 보가 지금 저우융캉(周永康)의 자리인 정법위 서기직을 맡아 부드러운 이미지의 시진핑과 함께 강한 이미지로 공안과 사법의 칼을 휘두른다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최근 베이징(北京)의 긴급 정치국 상무위원 비밀회의의 일각이 노출되면서 그 같은 분석의 구도가 깨지기 시작했다. 당시 회의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상황을 폭로한 보쉰(博迅) 등 중화권 매체들은 보시라이 실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그의 욕심이 정법위 서기가 아닌 국가주석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에 비밀회의에 참석한 상무위원들이 모두 보시라이의 실각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사실 보시라이가 충칭(重慶)시 당서기로 있을 때부터 계파 분열의 조짐은 있었다. 당시 보는 범죄와의 전쟁으로 유명세를 치렀는데 이때 희생된 사람이 보와 같은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당 기율위원회 서기 허궈창(賀國强)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충칭시 공안국장이던 왕리쥔(王立軍)이 청두(成都) 소재 미국 영사관을 찾았을 때 허가 공청단과 짜고 왕과 보 사이를 이간질해 성공했다는 설도 나왔었다.
왕이 보시라이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범죄를 조사하다 사이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간질설은 급속히 사라졌지만 분명한 것은 태자당 내부에서 보와 허 사이에 이견이 실존했다는 점이다. 한 계파 내의 의견 조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향후 권력 배분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중국의 권력 다툼 양상이 복잡한 이유로 상무위원 9개 보좌 중 7개의 주인이 바뀐다는 점을 꼽고 있다. 교체 수가 많다 보니 그 자리를 놓고 다툼도 그만큼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차기가 복잡하니 차차기 안배는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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