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중국

중국의 문자

아람누리 2012. 3. 25. 09:17

 

 

중국의 문자

 

 

보이는 것들도 있으므로 잘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시각적인 부호이자 사상을 교류하는 도구이며, 언어를 공간적시각적으로 멀리 전달하는 기능 또한 지닌다. 어느 민족이든 언어는 있지만, 문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자는 특정 사회의 문화성숙도를 나타내는 표지(標識)가 되며, 축적된 문화를 후세에 전하는 주요 도구이다. 한자는 바로 중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이고, 중국인의 문화를 후세에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인류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한자를 언제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한글 같은 경우는 분명 창제 동기와 목적 그리고 반포시기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한자는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자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한자 기원에 대한 학설을 귀납해 볼 필요가 있고, 또한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 문자학 자료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자의 기원

 

 

  중국어의 문자는 그 확실한 기원이 적어도 지금부터 3300년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50년의 한글의 역사에 비하면 상당히 긴 역사를 갖고 있는 문자이다 중국문자학자들 중에는 중국문자의 기원을 BC 4000년 신석기시대까지 올려야한다는 주장도 편다. 이는 신석기시대로 측정된 仰韶文化유적지 西安半坡에서 발굴된 도기 파편들에 새겨진 22가지 형태의 기호에 근거한 주장으로 비롯 갑골문 등 고문자의 형태와 비교하여 얻은 결론이기는 하지만 근거 자료가 너무도 빈약하고 또한 그 자료라는 것이 자의적 수수 기호일 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믿기 어렵다. 이밖에도 大汶口文化유적지에서 발굴된 도기조각에 새겨진 다섯가지 형태의 기호에 근거하여 BC 2500년경으로 기원을 보는 설도 있으나 역시 근거자료의 단편성이 문제로 지적된다. 그래서 확실한 고대 문자자료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갑골문이다. 갑골문의 연구는 근 백년간 상당히 진척되어 갑골문은 포괄적이고 실증적인 고대사료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 뒤에 고대한자에서 설명하겠다.

 

 

※ 창힐조자설 (倉頡造字說)

 

중국에는 한자 기원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한자는 黃帝의 史官이었던 창힐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는 『荀子』呂氏春秋』韓非子』등을 비롯하여 문자학의 경전이라 하는 『說文解字』를 통해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힐이라는 사람이 누구이며 언제 사람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상고시대의 사람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상고시대의 황제라 하며, 또 어떤 이는 황제의 사관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창힐이 실재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 만일 실재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 혼자서 한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글자라는 것은 어떤 한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한 시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문화의 구체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자는 창힐의 한자 조자설에 대해, 문자는 ‘約定俗成’의 결과물이며 창힐은 그저 당시 통용되던 문자를 정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 한자의 조자원칙

 

  흔히 한자를 ‘象形文字’ 혹은 ‘表意文字’라고 한다. 그것은 한자 가운데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글자가 많고, 또한 자형을 보기만 하면 그 뜻이 드러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특히 한자의 자체가 완전히 부호화되기 이전의 고문자에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나라 학자들이 귀납정리한 바에 의하면 한자의 조자원칙에는 6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육서(六書 ; 象形 指事 會意 形聲 轉注 假借)이다. 육서는 일반적으로 한자를 만드는 6가지 방법이자 원칙이라고 한다.

 

 

① 상형: 상형은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본뜬 글자이다. 예를 들어 日(), (), (), () 등이 이에 속한다 

 

② 지사: 지사는 형상 혹은 부호로써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낸 글자이다. 상형보다는 형상성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표의문자에 속한다. 지사는 자형결구에 따라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순수 약정부호의 성격을 지나는 것인다, 三과 같은 숫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기존의 상형자에 지시성의 부호를 덧붙여 구성된 것인데, 本은 木에다 그 뿌리 부근에 선을 그어 그곳이 뿌리임을 표시한 것이다 

 

③ 회의: 회의는 뜻을 표시하는 2개 이상의 형부가 결합되어 구성된 글자이다. 예를 들어, (쉬다)는 人과 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나무 옆에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④ 형성: 형성은 의미를 표시하는 형부와 소리를 표시하는 성부가 합쳐져서 구성된 글자이기 때문에, 소리와 뜻을 함께 나타내는 가장 이상적인 자형결구이다 

 

⑤ 전주: 육서 가운데 전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정론이 없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전주란 동일한 부수의 두 글자가 뜻이 같아서 서로 互訓관계에 있는 것으로, 考자와 老자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의가 불분명하고 실제적인 예 또한 考자와 老자만 거론하고 있다 

 

⑥ 가차: 가차는 말만 있고 글자가 없는 경우 비슷한 소리를 가진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 혹은 ‘그것’을 뜻하는 말의 글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리가 비슷한 ‘其’를 빌려서 그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후 ‘其’자가 원래 의미인 ‘키’보다 가차의인 ‘그’ 혹은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로 쓰이자, 새로이 형부인 ‘竹‘자를 더하여 ’箕‘자를 만들어 독립함과 동시에 전용자로 쓴 것이다

 

 

 

고대한자(古代漢字)구조

 

 

일반적으로 중국의 古文字小篆까지를 말한다. 소전의 다음 단계인 예서부터는 筆劃의 개념이 생기고 형태가 간략해지면서 소위 고문자에서 드러나는 한자의상형성이 급격히 감소되었기 때문에 예서 이전 단계인 소전까지를 고문자 단계로 보는 것이다 

 

① 갑골문(甲骨文)

 

甲骨片은 본래 약재상에서 거래되던 품목이었다. 明淸代부터 사람들은 이 갑골편을 용의 뼈, 龍骨이라 부르면서 각종 질병의 특효약이라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하는 대로 약재상에 팔았다고 하는데, 1899년의 어느 날 약재로 구입해 온 소위 용골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왕의영이 본격적으로 갑골편을 사들여 연구를 시작하면서, 용골의 효험을 지닌 약재에서 중국 고대사의 비밀을 담은 중요한 연구자료로 탈바꿈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갑골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 동안, 고문자학자들은 갑골문의 연구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자의 자형변화 및 의미 변화를 연구하고, 기존의 문자학 연구에 있어서의 오류를 수정하는 동시에,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하여 고대 사회를 재구성하는 등 문자학과 역사학, 고고학에 있어 많은 공헌을 남겼다 

 

 

  갑골문은 일반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된 문자가 아니라 조상신이나 자연신의 생각을 묻기 위해 상대 왕실에서 점을 치면서 점친 내용 및 점친 날짜와 점친 사람, 점괘에 대한 판단, 그 점괘가 실제로 맞아 떨어졌는지에 대한 결과 여부 등을 기록해 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대 왕실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들, 예를 들면 왕이 조상신이나 자연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수품은 어떤 것을 얼마나 사용하면 좋을지, 어떠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을지, 올한해 농사는 풍년이 들지, 주변 국가와의 전쟁이나 교섭에 있어 길할지 흉할지, 왕이 사냥이나 행차를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을지, 왕이 병에 걸렸는데 괜찮을지, 심지어는 오늘 날씨가 어떨지의 여부와 앞으로 열흘 간의 전반적인 운세가 길할지 흉할지 등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해 점을 쳤기 때문에 그 내용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글자가 있는 10여만 편의 갑골편에서 중복되는 글자를 제외하고 통계를 내보면 갑골문 낱글자의 수량은 총 4,600여 자라고 하는데, 考釋된 글자는 1,700여 자이고, 나머지 2,900여 자는 아직까지도 어떠한 의미와 독음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갑골문은 상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상대 왕실에서는 모든 일을 占卜에 의거하여 결정하였고, 그에 관한 기록이 바로 갑골문이기 때문에 갑골문은 상대 왕실, 나아가 상대 사회의 기본적인 상황을 개략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갑골문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 그 동안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지던 殷商代가 실존했던 왕조임이 밝혀졌다는 점만으로도 갑골문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② 금문(金文)

 

  금문이란 상대부터 춘추전국시기까지 약 1200여년 간의 각종 청동기물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킨다. 금문은 갑골문처럼 칼로 문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주조한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에 비해 필획이 두텁고 덩어리 형태(이를 괴상(塊狀)이라 한다)가 자주 보이며, 문자가 보다 규격화되어 갑골문에 비해 좌우나 상하를 바꿔 쓰는 異體字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특징이 있다 

 

금문의 주재료인 청동기는 사실 은상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은상대의 청동기에는 글자가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 까닭은, 은상대에 있어 문자는 왕실의 점유물이었고 또 상대왕실에서는 문자를 신과 의사소통 할 때 사용되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겨 점칠 때에만 사용했는데, 점칠 때 청동기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동기에 글자를 새겨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탓인 것 같다. 周代에는 정치형태와 사회제도가 변화되어 신권정치가 사라지고, 사회 각 방면의 종교적 색채가 대폭 사라지면서 점을 치는 일을 드물게 되었기 때문에, 갑골문의 사용은 급속히 쇠퇴한 반면 청동기의 제작은 매우 성행하게 된다 

 

 

 은상대의 청동기가 주로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주대에 들어오면 왕으로부터 신하가 관직이나 토지, 기타 물품을 하사 받았을 때나 어떤 공적을 세웠을 때 그것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념할 내용이나 사건을 기록한 기념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청동기에 새기는 명문의 글자 수는 당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③ 주문(籒文)

 

  주문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西周 宣王 때 太史라는 관직에 있던 주()라는 사람이 처음 이 자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주()가 만든 글자’라는 의미에서 주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하지만 글자란 어떤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적인 한자 통일 차원에서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이 자형을 정리하고 체계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근거를 들어보면 이러한 생각은 그저 하나의 가정에 그칠 뿐이다.

 

  주문(籒文)을 大篆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국가의 통일과 함께 동시에 문자의 통일도 단행하여 주문을 기초로 小篆이라는 자형을 만들었는데, 그 소전은 주문을 근거로 한 것이었으므로 ‘소전과 유사하면서 소전보다 먼저 사용된 글자체’라는 의미에서 대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현재 전해지는 주문 자료로는 東漢의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속에 실려있는 220여자의 주문(籒文)이 대표적이다

 

④ 고문(古文)

 

  고문은 六國古文 혹은 六國文字라고 하며, 전국시대에 진을 제외한 동쪽의 六國에서 사용한 한자를 가리킨다. 진대의 분서를 피해 사람들이 감춰두었던 책들이 한대에 들어오면서 하나 둘씩 발견되었는데, 책에 쓰여진 글자체는 한대 사람들이 이전 시기의 한자 자체로 알고 있던 대전이나 소전과도 달랐고,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와도 달랐기 때문에 이를 아주 오래된 ‘上古 시대의 글자체’라고 오인하여 고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문자통일 정책을 펴서 천하 통일 이전 육국에서 제각각 사용되던 六國文字, 즉 고문을 모두 폐기토록 했다. 진시황의 분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소중한 고서들이 사라지고, 진시황의 문자통일 정책으로 인해 고문 역시 역사에 더 이상의 흔적을 남길 수 없게 된 형편이었는데, 허신이 『설문해자』에 고문을 500여자 수록해 두었으며, 위나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경에서도 고문을 고문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일부나마 고문의 자형을 살펴볼 수 있다 

 

⑤ 소전(小篆)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 한 후 국가 정비를 위해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함과 동시에 문자의 통일도 단행하였다. 전국시대에는 각 제후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통치하였으므로 나라별로 다른 한자 자형을 쓴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전국이 통일된 후에는 애기가 달라진다. 각 지역으로 행정문서를 주고받아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마다 쓰는 한자체가 달라 행정에 어려움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문자 통일의 필요성을 느낀 진시황은 ‘동일한 글자 쓰기’ 정책을 실시하여 당시 기존의 진나라에서 쓰던 대전의 자형을 간략하게 만들어 통일왕조에서 사용할만한 한자를 정리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일왕조 진대의 공식서체로 사용된 소전이다 

 

  지금 볼 수 있는 소전 자료로는 허신의 『설문해자』에 실린 소전이 대표적이다. 허신은 소전을 포제자로 삼아 총 9,353자의 소전을 수록하여 자전을 만들었는데,『설문해자』는 역대로 귀중한 저서로 학자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2000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또 그 덕분에 소전 역시 현재까지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소전은 전체적으로 약간 타원형이고, 획의 굵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며, 곡선의 형태가 많고, 좌우 혹은 상하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문 자형 중에서 동일한 형태가 중복되는 편방은 생략시켰고, 전체적인 형태를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던 편방을 하나의 형태로 통일하였고, 한 글자 안에서 편방의 위치를 고정시켰다.

 

 

근대한자(近代漢字)의 구조

 

① 예서

 

  예서는 일반적으로 秦隸와 漢隸로 나뉘어진다. 진나라 관리들이 늘어나는 행정업무에 발맞추어 서사의 편의를 위해 소전 대신 사용한 자체를 진예라 하고, 한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해서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는 자체를 한예라고 한다. 예서의 특징은 ‘예변’이라 할 정도로 문자자체의 큰 변화에 있다. 우선 소전이 작사각형의 형체를 하고 있는 반면에 예서는 옆으로 넓게 퍼진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소전이 둥근 필체인데 반해서 예서는 곧은 필체로 변하였다. 또한 소전이 감싸는 필세인데 비하여 예서는 마지막 부분이 날아갈 듯한 삐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큰 특징은 偏旁형체의 변화이다. 예서의 편방은 소전에 비해 간화되고 병합되고 변형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한 편방의 혼동현상까지 발생하여 결국 예서에 와서는 한자의 특성인 表意의 기능이 대폭 상실되고, 순수한 부호적 성격을 띤 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② 초서

 

  한나라 때에는 예서 이외에 초서를 사용하였는데, 초솔하고 간편한 자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흔히 예서를 간략하게 흘려 쓴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한나라의 공식적인 일급 자체는 예서이고, 보조적인 성격의 이급 자체가 초서였다. 간략화를 추구하고자 한 초서의 기본 정신은 현대의 간체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③ 해서

 

  해서는 ‘모범적이고 반듯하여 본보기’가 되는 한자 자체를 말한다. 해서는 예서의 바탕위에 동한 후기에 싹이 터서 삼국을 거쳐 위진시대에 성숙된 자체인데ㅡ 특히 당나라 때 자체 표준화 사업으로 이체자가 정리되고 정자가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당대 이후부터는 眞書 또는 正書라고도 불렀다. 해서는 예서의 삐침법 등 불편함을 줄이고 초서의 산만함을 바로 잡기 위해 형성된 자체이다. 즉 예서와 초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모범 자체를 만든 것인데, 오늘날까지 가장 대표적인 자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④ 행서

 

  동한 후기에 추서와 해서를 기초로 두 자체의 장점을 겸비한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자체가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행서이다. 행서는 해서의 원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초서의 서사원리를 적용하여 민첩함을 추구하였다. 즉 해서의 반듯한 원모양을 잃지 않으면서 빨리 쓸 수 있고, 또한 변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필기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字典詞典, 그리고 玉篇

 

  한자를 공부할 때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 그것은 바로 字典과 詞典이다. 자전과 사전은 한자의 정확한 형체를 아는데 도움이 되고, 독음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 해석에도 도움이 된다. 자전은 문자 그대로 글자단위로 된 사전이고, 사전은 낱말단위로 된 사전이다. 그러므로 자전의 표제자는 모두 단자로 되어있으나, 사전은 표제자가 단자도 있으나(단자가 한 낱말인 경우) 두 글자 낱말로 된 것이 다수이다. 옥편은 자전에 구분되어진다. 한글자의 자형과 독음, 의미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을 자전이라고 정의했을 때,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전은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이다. 중국의 한자학은 바로 이 『설문해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문해자』에서는 소전을 표제자로 수록하고, 음과 의미는 동일하면서 자형만 다른 이체자인 고문과 주문 등도 함께 수록하였으며, 각 글자별로 독음과 의미 설명도 분석한 자전이다 

 

  본격적인 최초의 자전은 梁代에 顧野王이 편찬한 玉篇이다. 최초의 옥편에는 1 6917자가, 현존하는 옥편에는 2 2561자가 수록되어 있다. 옥편은 설문해자와 같이 부수법을 취하고 있으나 그 종류에 변화가 생겨서 총 542부수로 한자를 분류한다. 옥편은 반절법을 이용하여 발음을 제시하고 있으며 한 글자에 대한 다양한 의미와 예문을 제시함으로써 오늘날의 자전과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繁體字와 簡體字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 국가 공인의 정규 문자로서 사용되는 것은 ‘簡化漢字’ 또는 ‘簡體字’라고 하는 간략화  한자이다. 이에 대해서 전통적인 자체의 한자, 즉 우리가 말하는 정자는 ‘繁體字’라고 한다. 간체자는 중국대륙, 싱가포르에서 사용되고 있고 번체자는 대만, 홍콩, 우리나라에서 사용된다. 간체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중국문자개혁위원회에 의해서 1955년에 ‘제1차이체자정리표’로서 제정된 것이 그 시초이다. 여기에서는 ‘裏’와 ‘裡’ 같이,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쓰는 방식이 몇 가지씩이나 되는 것 810가지에 대해서 字體의 통일을 꾀했다. 그 후, 같은 해 ‘한자간화방안’의 초안을 발표하여 널리 일반의 의견을 들었다. 그 결과 ‘한자간화방안’이 만들어지고, 195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정식으로 사용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64년에는 ‘간화자총표’(2)가 나와 簡化偏旁의 사용 범위 등을 상세하게 정하고, 상용간체자로서 2238(편방으로도 사용되는 132字 포함) 가 정해지게 되었다. 간체자는 민간에서 흔히 사용되던 속자를 비롯해서, 고자라든지 草書體를 楷書化한다든지, 혹은 글자 형태를 생략하거나 개조한 것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채용된 글자들이 포함 되어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쓰고 있는 略字와 일치하는 것도 적지 않지만,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