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和信

남한산성 순교성지

아람누리 2009. 10. 27. 23:19

 

 

 

 

 

남한산성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비

 

남한산성 성지 순교역사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요충지였으며, 조선 중기인 1577년(선조 10년)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인 부윤(府尹, 종2품)이 상주하다가 1623년(인조 1)에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경관인 유수(留守, 정2품)가 파견되었다. 현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에 속해 있는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595년(선조 28)에 현재와 같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은 뒤 1626년 (인조 4)에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광주는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 한때 부윤으로 복구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광주 유수의 치소가 이전 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여러 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순교터가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1801년)때에는 이 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갖은 형벌을 당한 뒤에 칼로 목을 베는 참수(斬首),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絞首),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등 여러가지 사형으로 영광의 순교를 얻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에는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 오자, 형을 집행하는 포졸이나 군사들 마저도 피를 보는데 진저리를 내고 새로운 사형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이것이 바로 어느 법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이와 같이 고통속에서도  진리를 증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신앙 선조들의 넋과 진토가 스며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손들의 무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버려져 온 점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이제부터라도 이 곳을 순교 성지로 개발하고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그 분들이 모두 시복시성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모두 관심과 기도로써 그 분들의 순교 신심을 자발적으로 현양하고,  고귀한 순교 정신을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양비 아래에 새겨진 순교자 명단

 

순교정신을 기리며 현양비를 세우는 의미를  새겨 놓았다.

 

 

남한산성 성당 :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두분의 성인 유해가 (김성우-안토니오,

최경환-프란치스코)모셔져 있고 성지 순례 미사 전례시 양영성체를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번지

☎  031-749-8522~3 (사무실 )

담당 : 박경민(베네딕토) 신부

www.nhss.or.kr

 

 

 

 

구유 : 전통적 이미지의 성요셉, 성마리아,아기 예수님으로 꾸며져 있다. 구유는 연중 전시하고 있으며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은 동방의 세 박사가 귀한 선물을 봉헌하듯 마음을 모아 초를 봉헌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입구에 있는 성모상

 

 

 

 

 

 

 

야외 미사터로 가는 길목의 단풍이 든 나무들

 

야외 미사터 입구에 있는 성모상

 

 

2009.10.27(화) 순교 성지의 야외 미사 현장

 

성찬전례 모습

 

이 사진--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계실 때 제대 주변에 있는 나무 (느티나무)에서

노란 색 낙엽이 우수수하고  떨어졌다.  신부님은 물론이고 신자들 모두 기분이 들떠서  환호했다.  신부님도 강론하시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그 순간을  카메라로 잡는다고  시도했는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은  사진에  안 나왔네......섭섭,   이럴 때  좋은 카메라와  사진실력이 아쉽다.       

주엽성당의 요셉포토크럽의   멤버가 있었으면  그 멋진 모습을  포착했을 텐데   ..아쉽다.                                                                                                                         

 

 

 

 

 

 

 

 

 

 

위 사진들은  야외 미사터

   

야외 제대

 

 

포청골 - 포도청이 있던 자리,  남한산성으로 잡혀온 교우들이 포도청에 끌려 가

1 차적으로 심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은 옥에 가두어 두었다. 행적이 밝혀지신 38명의 순교자 중 22명이 옥사한 것으로 전해 진다. 지금은 포도청은 흔적도 없고  "포청골"이라는 표지석만 있고 , 그 자리에는 주차장과  음식점이 있을

뿐이다.                                                                                                      

 

 

 

연무관 터 : 새로운 사적이 발견됨에 따라서  기존의 연무관을 헐고  새롭게 연무관을 신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연무관은 수어영의 다른 이름으로 종5품 판관이 집무를 보는 제승헌이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좌승당과 같이 일반 신자들을 신문하고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하였는데, 이렇게 고문을 받으시다가  순교하기도 하였으니 신앙 고백터이며, 또한 순교터이다.                                                                                  

 

 

수구문 -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은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 곳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屍軀門)이 되어 버렸다.이제 그 흔적은 골짜기의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박해 시대 때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십일씩 방치되면서 그 피가 경안천(광주천)까지 흘러 내렸다고 전할 만큼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쌓여 있던 곳이며, 사람들이 꺼려했던 곳이다.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승들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 시신이 잠자는 듯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동문 부근의 성 - 이 성의 오른 쪽 아래에 수구문이 있다.  동문에 연결되어 있던 성이나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 때문에 끊어져 있다.                                                

 

수구문의 성 바깥쪽 모습

 

수구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붉은 낙엽 -  마치 순교자들이 흘린 피빛인 것 처럼------

 

 남한산성 동문 -  이 문의 오른 쪽 성 아래에 수구문이 있다.

 

남한산성 동문 -  아스팔트 도로 때문에 끊어져 있다.

 

 수구문 위에 있는 성

 

수어장대

 

 

 

 

 

 위 사진들은 남한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단풍이 든 나무들

 

 

아래 사진들은  남한산성 일대의 단풍든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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