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 난 청계천

청계천 2 ( 광통교 )

아람누리 2005. 11. 18. 01:26

 

광통교  아래에서  올려다  본  광통교  밑 부분의  일부

 

 

 

광통교  밑  부분을  아래 쪽에서  올려다  본  것임 

 

 

 

모전교 쪽에서  본  광통교,  복원된  청계천의  폭이  넓어서,  광통교  본래의  자재는  반쯤만  쓰였고,  나머지  부분(사진의 오른 쪽)은  현대식  다리로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청계천 공사의 역사 속으로

   

신 병 주(건국대 교수)


 2005년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청계천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청계천이 복원된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찾아갈 정도 정도로 청계천은 모두가 사랑하는 휴식처 가 되었다.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뚜껑이 덥혀있었던 청계천이 그 장막을 걷게 된 데는 문화와 환경과 같은 삶의 질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가 큰 작용을 하였다.


지금부터 250여년 전인 영조시대. 그 때도 청계천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원인은 서울로 밀려드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출하는 폐기물이 청계천에 몰리고,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청계천의 흙들은 계속 쌓여만 갔기 때문이다. 큰 비라도 내린다면 서울 전 지역이 큰 홍수 피해를 입을 것이 확실하였다. 스스로 서민을 대변하는 국왕임을 표방한 영조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태종, 홍수대책의 일환으로 청계천 공사를


 서울이라는 도시는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오면 서울한양 도성 안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전기인 태종 때 처음으로 한양 도심을 흐르는 하천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진 것이다.

 

1405년 한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긴 태종은, 1406년 1월 16일 한성부의 인부 6백명으로 하여금 개천을 파는 일을 맡겼다. 청계천의 골격이 만들어진 첫 시발점이었다. 이로부터 6년 후인 1412년에는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태종은 “해마다 장마 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고 하면서도 이번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는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하륜, 성석린 등이 농한기를 이용하여 도성에 운하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고, 태종은 개천도감을 설치하여 청계천 공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1412년 2월 15일 완성된 수로는 대광통(大廣通: 지금의 광교)에서부터 오간수문을 지나, 중랑천에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공사에는 희생도 따랐다. 개천도감에서는 작업에 나와서 죽은 자가 64인이라고 보고하였고 태종은 이들의 요역을 면제해주고 또 콩과 쌀을 줄 것을 지시하였다. 태종은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며 공사의 완공에 따르는 감상을 피력하였다.

 

영조, 청계천 준설공사로 홍수 막고 일꾼에겐 품삯 지불


 태종 시대 이후 350년이 지난 18세기 중반, 탕평책과 균역법 등의 실시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영조는 누구보다 서민군주임을 자처하였다. 18세기 영조 시대는 조선후기 산업과 도시의 발달이 서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농촌 인구가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정착한 곳은 산꼭대기나, 하천 주변. 청계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계천 주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땔감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근처 산림에 손을 댔다. 한양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홍수 때에는 많은 흙들이 밀려와 청계천을 메웠다. 문제점을 파악한 영조는 청계천의 공사를 명했다. 청계천 공사를 통해 홍수에 대비하고, 당시 도시로 유입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하였다. 홍수를 막고, 도시 실업자 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한 것이다.

 

청계천 공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조는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1758년 5월 2일에는 청계천 공사가 가능한 지의 여부를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구체적인 방안들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1758년 5월 2일 영조는 숭문당에서 승지 등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廣衝橋)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음을 우려하였다. 어영대장 홍봉한은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면서 하천의 준설이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일부 사관들은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나, 만약 백성을 동원하려 한다면 초기에는 민원(民怨)이 많을 것임을 우려하였고 영조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장기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본격적인 공사는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한양의 일반 백성들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들과,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승려,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쏙쏙 모여들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여 명에게는 품삯을 지급 하였다.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영조는 공사에 참여한 일부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에게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공사에도 적용되었다. 그만큼 백성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조선시회가 상업적인 측면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통교  교각에  새겨진   글--경진지평(庚辰地平) 

 

청계천 공사 기록 『준천사실』, 백성들이 적극 협력한 과정 담아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에 대한 의지는 1760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영조는 특히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이었던 오간수문의 공사가 6일 만에 끝낸 사실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호조판서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영조는 모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이처럼 영조대의 준천 사업은 국가적 사업으로 모든 백성들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1760년 3월 16일 마침내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되었다. 『준천사실』이라는 책의 제목은 영조가 직접 정하였다. 영조는 공사의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입니다’고 하여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였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고, 영조는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하여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土砂)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에게도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광교 쪽에서  본  광통교

 

공사기간 동안 영조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시험을 치루고 뽑힌 사람들을 시상하였다. 청계천 공사 완성의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에는 당시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동대문에서 관리들과 함께 공사 현장을 목격한 모습 등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일컬어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영조는 청계천 공사를 통하여 도성 내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도시 실업자를 구제하는 면모를 보였다. 서민군주임을 자처한 영조는 국정의 최우선으로 삼은 민본 사상을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했던 것이다.



다산연구소의 실학산책  제 89 호 ( 2008. 5. 4. )에서  가져 옴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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