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저런일

1950년대의 상장(賞狀)--청계국민학교

아람누리 2007. 5. 21. 21:42

 


서울청계국민학교


 

     1950년대의 상장 (賞狀)

 

서울청계국민학교: 서울시 중구 수하동에 있던 이 학교는  강남지역 개발에

따른 강북지역의  인구 감소에  따라, 다른 몇개 학교와 함께 1969년에 폐교되었다.     그 후 1992년 5월에 같은 교명을 가진  초등학교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개교하였다.

 

청계국민학교의 기존  3층 건물은 1974년에   동국제강(주)가  매입하여 2007년까지  33년간 동국제강 본사 사옥으로 사용하다가  2007년  청계천 일대  개발에 따라   사옥으로  사용하던 청계국민학교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28층,

지하 5층의  새사옥(Ferrem Tower)를 신축하였다( 2010년 8월 입주).   이제는 그 주변 다른 건물들도 모두 고층 건물이  되어서  조촐하고 아담했던 청계국민학교의  옛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위 사진은 기존 청계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동국제강  사옥  FERRUM  Tower 건물,  이 사옥은 동국제강이  재무구조개선을  위하여  2015년에  삼성생명(주)에  매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도  임대하여  동국제강 본사가  사용하고 있다..




                                      1950년대의  국민학교 상장

 1950년대의  국민학교 상장 : 등사 원지(謄寫原紙)에  철필(鐵筆)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謄寫機)에 걸고 종이를 올려 놓고, 등사잉크를 묻힌 롤러(roller)를 밀면서  한장, 한장 씩  찍어 냈다.  이 때  사용된 종이는 요즘 프린터 용지같은   좋은 종이가 아니라 재생 종이인 누른 빛의 갱지(更紙)를 사용했다. 

요새는 초등학생들도 PC의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여  여러가지 글자체로 글을 써서  쉽고 자유롭게 프린터로 인쇄하지만  그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 등사 원지(謄寫原紙) : 등사판 박아 원고 쓰는 얇은 기름종이. 얇은 종이 파라핀, 바셀린, 송진 따위 섞어 만든 기름 먹여서 만든다. )

 

    그 당시에는  서기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檀紀)연호를 썼다.

    단기 4285 년은  서기 1952 년이다.(단기 년도 - 2333  =  서기년도 ) 

    한국전쟁 ( 6.25 ) 이 일어난 때는 1950 년, 6 월 25 일(일요일)이다.

 

   

 

 

 

 

 

 

 

 

 

 

 

 

 

 

 

 

 

 

 

 

 

 

 

 

 

 

 

 

 

 

 

 

 

 

 

 

 

 

 

 

 

 

 

 

 

 

 

 

 

1950년대의 국민학교 성적표

 

 

 

 

 

 

 

 

 

 

 

 

 

 

 

 

 

 

 

 

 

 

 

 

 

 

 

청계국민학교 졸업 앨범

                     단기 (檀紀 )4291年 < 서기(西紀 )1958年>

 

 

 

   청계국민학교  교사(校舍)  사진과   교가(校歌)악보, 가사가  게재되어 있다


 

 

 

 

 

위 사진의  동그라미안은 나 (김현무)이며 국민학교 졸업사진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

 

위의 모든 것 (졸업앨범 1점,  성적표 6점, 상장 26점등), 모두 33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2013년  5월 2일에   기증하였다.

[ 이 기증품들은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지는 않고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다.]

 

 

 

 

                                      2014년  기증자  명패 제막식

 

 

 

2014년  기증자 명패제막식에서  박물관장으로 부터 기증증서를  받고 있는 모습

 

 

 

           아래는  서울역사박물관 1층벽에  설치 되어 있는  기증자  명패

 

 

 

 

 

 

 

 

 

 

 

 

 

 

2014년 10월 8일에는  1985년에 사용되던  UN 팔각성냥 

3점을 기증하였다.

 

 

 

 

 

 

2015년  기증자 명패 제막식에  참석하는 본인에게  박물관 직원이 꽃송이를 꽂아 주고,  명찰을 달아 주고  있다.

 

     

 

  1950 년대의  청계국민학교   이야기

 

 

 

 

동국제강 본사는 도화서, 수하동소학교, 청계국민학교의 옛터

2005-08-09

위의  상장에 나오는  이름, 김현무(블로그 명 : 제미니)는  서기 1958년,

 청계국민학교  49 회 졸업생으로   이 글을 쓴  이상억 교수의  1 년 후배이나,

나이는  1944 년 동갑이다.  그 이유는  이상억 교수는  원래 서울 출신이지만

위의 김현무는  한국전쟁 당시  38도선 이북에서  피난을  나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뒤늦게  청계국민학교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57년 청계초등학교(이하 청계국민학교로 표기) 48회 졸업생인 이상억 교수가 올해로 건립 110년을 맞는 현 동국제강 본사 사옥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이번 호에는 청계국민학교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고,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당시 주변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 소개한다.

청계국민학교 이야기

글 이상억(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국제강 본사가 1974년이후 자리 잡은 수하동의 현 사옥은 역사가 깊은 곳으로서 과거에 무엇을 하던 곳인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행히 동국제강은 과거에 세워진 학교 3층 건물 및 강당의 원구조와 교정(校庭) 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 시내 최중심부에서 이만큼 옛 건물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110년 역사 이어온 건물

현 중구 을지로입구 수하동 50(64로도 나옴)번지 일대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에는 조선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도화서는 그림의 교수(敎授), 고시(考試), 제조, 보관 등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했다가 후에 도화서라고 개칭했다.
청계국민학교의 전신인 수하동소학교가 시작된 것이 110년전 1895년 9월 10일이다. 110년은 웬만한 흔적은 사라지는 긴 세월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5년 공부, 호주에서 4년 교수를 했었기에 그런 역사가 짧은 나라들에서는 110년이라면 특히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청계국민학교의 1957년 48회 졸업생으로 이 글을 쓰게 되어 동국제강이 옛 학교의 골격을 그대로 보존해 온 일이 고맙기 그지없다.
또 필자는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 이승업가(옛날 찻집)의 원 위치인 삼각동 36번지(수하동 북쪽 건너편)에서 이 학교를 다녔고, 집안에서 아버님을 비롯한 7분 삼촌, 우리 4남매가 다같은 졸업생인 까닭에 더욱 의의가 깊다.
아버님(李暎雨)께서는 1917년생(현재 88세)이며, 1924년 4월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4년제로 교무실 1개, 교실 8개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일자형(一字形) 교사였다. 1930년 3월 졸업까지 5, 6학년이 더 생기고 각 학년 2반씩 증설, 교실도 12개가 되어 T자형(T字形) 2층집으로 1928년 이전에 증축되었다 하셨다.
학생은 남자만으로 구성되었고 조선어(1주 약 3회),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도덕), 도화, 습자, 음악, 체조 등의 과목이 있었으나 사회, 자연은 별도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셨다. 이 자리에 3층 ㄱ자형(ㄱ字形) 현교사의 골격이 선 때는 3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학교 북측 삼각동과 면한 소위 소광교(小廣橋) 길은 복개 전이어서 개천물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운동장 앞 정문 쪽 동측 길(현 외환은행으로 가는 길) 개천은 이미 복개가 되어 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님의 설명대로 당시 학교와 그 주변을 그려 보면 우측 그림과 같다.



청계국민학교의 간략한 역사

1895년 8월 1일부터 ‘소학교령’이 시행되면서 한성에는 수하동소학교(水下洞小學校)를 비롯해 8개의 관립소학교가 세워지게 되어, 9월 10일 서울 중구 수하동 50번지, 옛 ‘도화서’터에 수하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수하동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개교했고, 1930년 9월 1일 청계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41년 3월 31일 일왕의 칙령 ‘국민학교령’에 의해 학교 명칭이 청계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1956년 2월 9일에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국학자 자산(自山) 안확(安廓 1886~1946)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교육받았던 터전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1969년 2월 5일 제60회 졸업식을 끝으로 졸업생 1만440명을 배출하고 남은 학생은 1969년 11월 5일 도심지 개발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폐교하면서 분리 수용되었다. 현재 졸업대장은 남산초등학교에서 보관하면서 증명서 발급 사무를 대행하고 있다. 그 뒤 25년이 지나 1990년 11월 7일 노원구 중계3동 513-1에 교사를 착공하여 1991년 10월 30일 서울청계국민학교(교명계승) 설립을 인가받았다. 1992년 5월 6일 서울청계국민학교 개교식이 있었고 1996년 3월 1일 청계국민학교를 청계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다음호에 계속).

 

 

 

 

청계국민학교…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 [특별기고]
2005-09-08
동국제강 본사 건물은 오는 9월 10일이면 건립 110주년을 맞는다. 청계초등학교 졸업생인 이상억 교수는 지난 6월 본사를 직접 방문하고 둘러 보았다고 한다. 지난 호에 이어 이교수의 방문 소감과 재학 당시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청계국민학교 이야기<2>

"청개구리들아~"

이상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기본 건물 구조는 예전 그대로
첫 방문은 지난 6월 9일, 먼저 동국제강 총무팀장과 연락을 했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물론 리모델링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였다. 식당도 강당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운동장 역시 그대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정문이 옛날엔 학교 뒷문이었다는 점이다. 학교 운동장쪽 문이 당시엔 정문이었다. 지금과 앞 뒤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 새롭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지난 6월 초에 뉴욕에 살던 동창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48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인터넷으로 학교를 검색해 보았더니 ‘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라고 소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을 계기로 청계초등학교(이하 당시 명칭인 ‘국민학교’ 사용)의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창들은 “그 정도의 역사면 해외에서는 유적지로 보존됐을 것”이라며, 모두 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학교 뒤로 소광교 개천이 흘렀고, 현재 조흥은행 본점 앞이 대광교로 그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 바로 삼각동이다. 우리 집은 삼각동에 있었다. 현재 조흥은행 100년 기념관 주차장 터다. 문화재처럼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 간 뒤로 가끔 그 앞을 통해 지나가 볼 기회가 있었다.
학교는 69년에 폐교됐고, 70년대 미국 유학시기를 제외하고는 2~3년에 한 번씩 간간히 수하동 근처를 방문했기 때문에 동국제강이 사용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동국제강 사옥에 대한 뉴스를 감명 깊게 본적이 있다. 현장(설비)에 투자하기 때문에 본사 건물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서울 톱 10이내 수준
우리 집안이 모두 수하동, 장교동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만도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20여명이상이나 된다. 나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형제 8분도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다.
당시 청계국민학교는 그냥 보통 학교 중에 하나였다. 조선말 남산골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곳이었고, 계동 등 경복궁 인왕산 사이 지역에 부유층이 있었다. 특히 당시 수하동과 삼각동은 상인들과 기능인들이 많았다. 그리 부자동네는 아니었다.
당시 50년대는 덕수국민학교가 유명했다. 수송국민학교(이 곳도 현재 종로구청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도 좋은 학교에 속했다.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경기고에 7명정도 들어갔다. 덕수 같은 경우 40명정도 됐을 것이다. 그 정도면 시내 톱 10 안에 드는 학교가 아니었을까?



사방팔방 훤히 보였던 시내 중심가
‘청계’란 이름은 역시 개천 이름이다. 옛날엔 다른 학교가 있는 지역엔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들과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학교와 학교 사이에는 접경지대가 있었다. 접경지대에 있던 학교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곳에서 서로 마주치면 늘 싸웠다. 주변 학교 아이들은 우리 보고 “청개구리들아~”라고 놀렸고 주로 마주쳤던 방산국민학교 아이들에게 “방구쟁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
50년대는 학교시설이 열악했지만 자연하고 가까웠다. 지금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 가는 길도 쉬웠다. 수업이 끝나면 남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고, 중간에 명동성당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지금 외환은행 자리는 척식회사로 일제 수탈기관이 있었다. 중간에 내무부가 있다가 외환은행이 들어선 것이다.
명동에는 성당 외에 그렇다할 큰 건물들이 없었다. 2층정도의 상점들만 즐비했다. 종로 쪽은 화신백화점정도만 있었고 광화문도 훤했다. 간혹 화신백화점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던 기억도 난다. 사실 명동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동네였다. 비만 오면 질퍽했던 기억이 난다. 명동을 옛날엔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충무로는 일본인들만 살던 곳으로 50년대엔 상당히 발달된 곳이었다. 종로는 한국의 상인들, 즉 육의전이 있던 한국전통 상점이 밀집한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종로에 살았다. 당시엔 사방팔방으로 건물이 즐비한 지금보다는 쉽게 다녔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잘 한 것 같다. 예전엔 지금같이 그렇게 넓지 않았고 더 좁았다. 50년대엔 그 곳에서 빨래도 했다. 그러다 하수구가 많이 생기면서 물이 더러워졌다. 50년대엔 특이하게 광교에 땅꾼들이 살았다. 살모사를 잡아 전시도 해놓고 끓여 먹기도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교건물 주변에 그대로 남아있는 가게는 하동관 곰탕집이다. 이 곳은 아마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됐을 것이다. 내가 44년생이니까 1930년쯤에 생겼나? 주인을 찾아 봤는데 지금은 친척이 맡아서 하고 있단다. 요즘도 옛날 방식 그대로 아침에 끓인 진국으로 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 건물 맞은 편에는 대성관 곰탕집이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그 집 주인 아들과 동창이었다. 개성상회도 정말 오래된 가게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지금은 스타벅스가 생겼다.
그리고 청계국민학교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국제강 사옥. 삼각동 개발로 건물이 다시 들어설 것이라고 들었다.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하는데, 그게 안 되면 한 귀퉁이나 강당이라도 남겨졌으면 좋겠다. 개발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디 옛 것을 잘 살리면서 개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설명] 이상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57년 졸업한 이상억 교수가 당시 졸업앨범을 살펴보고 있다. 같은 학교 3년 후배인 동생 이경애 씨도 앨범을 보내주었다.

 

 

 

 

 

나의 모교 청계국민학교

 

“너는 어느 국민학교 나왔냐?”

내가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하는 얘기다.

나는 서울 중구 광교 뒤편, 현재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청계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현재 동국제강 본사가 들어서 있고, 일부 리모델딩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그대로 있어 그 당시 내가 다녔던 건물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학교가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인쇄소, 패션거리(명동)로 둘러 쌓여 있어 면학분위기가 조성이 안되었고, 주택이 드물어 내가 5학년이던 당시 남대문, 인현, 수송, 방산국민학교 등과 더불어 폐교가 되었다.

그때 우리 학교 전교학생수는 680명으로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미동국민학교는 10,000명이 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2부제 수업을 하는 것과는 확실히 비교되었다.

나는 졸지에 집(중구 장교동)과 가까운 남산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얼마 있다가 아현동으로 집이 이사 가는 바람에 1년 후 아현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 2명 청계국민학교 동기들을 만났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5년 동안 사귄 그 많은 친구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졸업앨범이 없어 무척 안타깝다.

어디선가 글을 읽다 보니 소설가 마광수교수가 청계국민학교 출신이라고 하여 마치 잃어버린 동문을 찾는 듯 기분이 좋았다.

내가 청계국민학교에 다니던 기억을 되새겨 본다.

청계천 인근 판자집에 살던 나는 책가방을 살 형편이 못되어 책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춤에 매고 한동안 학교에 다녔는데, 을지로 입구 적산가옥에 살던 부잣집 친구들은 통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어깨에 매고 다녀 나는 서울에 올라온 시골촌놈 같아 창피해서 학교 가기가 싫다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또다시 펴서 손뼉 치고, 두 손을 머리에….
“ 피아노를 잘 치는 손가락을 몇일까? 우리 모두 다같이 세어봅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모두 열이다”
“섬집 아기, 초록빛 바다, 고향땅, 과꽃” 등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따라 부르던 수십 곡이 넘는 동요는 40년도 훌쩍 지난 지금도 입가에 맴돈다.

나는 고학년이 되어 도시락을 싸오기 싫을 때 종종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가게에서 하얀 크림이 들어있는 삼립빵을 사서 친구와 미끄럼틀에 올라 운동장을 내려다 보면서 먹었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며 갈증을 해소하였다.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가 드디어 폐교하던 날 아침, 폐교를 알리던 할아버지 같은 교장선생님은 검은 안경을 벗으며 연실 눈물을 훔쳤고, 우리 모두는 선생님, 학생 할 것 없이 부둥켜 안고 울었다.

결국 그 교장선생님은 내가 전학했던, 남산국민학교에 교장선생님으로 다시 오셔서 얼마나 기뻤던가!

그 당시 나는 이사간 아현동에서 명동에 있는 남산국민학교까지 두어달 버스를 타고 다녔
는데, 만원버스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학교에 도착 후에도 몸이 욱신거려 수업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을지로 입구를 지나면 일부러 내가 공부했던 청계국민학교(現동국제강
본사)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우리 집이었던 브랭땅 백화점 자리(장교동)까지 과거를 상상하며 천천히 걸어보기도
한다.

청계국민학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삼화인쇄소가 나오고, 대로변 큰길을 왼쪽으로 돌면
건너편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웅장한 내무부건물(現외환은행 본점)을 쳐다본다.

‘땡땡’ 거리는 전차를 바라보며 100여미터 걷다가 좁은 인쇄소 골목으로 들어오면 그 한쪽
에 있던 낡은 삼일아파트 옆이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위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늦가을이면 지붕 위에 올라 은행나무를 돌로
치며 흔들어 은행이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였다.

아현동으로 이사간 후 학창시절 몇번 내가 살던 장교동을 가보았는데, 지금은 상전벽해되어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다.

건물, 무너지다

 




위 사진은 우리 회사 건물 뒤쪽, 그러니깐 청계천을 가는 길목에 있던 동국제강 본사 건물이다.

굳이 허물고 있는 남의 회사 건물을 찍은 이유는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이다.

저 건물은 ㄱ자형으로 된 3층짜리 건물이다. 보시다시피 건물 앞에는 널찍한 앞마당도 있다. 허물기 전까지는 잔디밭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회사 사옥 치고는 정말 특이한 녀석이라서 관심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원래는 청계국민학교 건물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납득하였다.

사무실의 화장실 입구 쪽에서 보이는 건물이라 양치질을 할 때마다 창가에 서서 바라보곤 하였다.

내심 저런 건물에서 일하는 것도 참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건물도 별로 높지 않고 마당도 널찍하니 가끔씩 쉬러 나오기도 좋고...

소문을 듣자하니 주인이 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층 주상복합 빌딩을 지을 계획이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고 싶은 욕심에 자기 건물 부수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오래된 학교 건물이라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데다, 삭막한 도심 속에 신선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시스코 본사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워낙 땅이 넓은 동네라 그런지 대부분의 건물이 1,2층이고, 서로 널찍널찍 떨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 부러운 환경이었다.

혹시 운이 좋아서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성공을 거둔다면... 회사 직원들에게 그런 공간을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매일 사진의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되새기곤 했는데, 이젠 그럴만한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인데, 지금은 완전히 다 허물어서 무너진 돌더미만 남아있다. 좀 있으면 돌더미도 다 없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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