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청계국민학교
1950년대의 상장 (賞狀)
서울청계국민학교: 서울시 중구 수하동에 있던 이 학교는 강남지역 개발에
따른 강북지역의 인구 감소에 따라, 다른 몇개 학교와 함께 1969년에 폐교되었다. 그 후 1992년 5월에 같은 교명을 가진 초등학교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개교하였다.
청계국민학교의 기존 3층 건물은 1974년에 동국제강(주)가 매입하여 2007년까지 33년간 동국제강 본사 사옥으로 사용하다가 2007년 청계천 일대 개발에 따라 사옥으로 사용하던 청계국민학교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28층,
지하 5층의 새사옥(Ferrem Tower)를 신축하였다( 2010년 8월 입주). 이제는 그 주변 다른 건물들도 모두 고층 건물이 되어서 조촐하고 아담했던 청계국민학교의 옛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위 사진은 기존 청계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동국제강 사옥 FERRUM Tower 건물, 이 사옥은 동국제강이 재무구조개선을 위하여 2015년에 삼성생명(주)에 매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도 임대하여 동국제강 본사가 사용하고 있다..
1950년대의 국민학교 상장
1950년대의 국민학교 상장 : 등사 원지(謄寫原紙)에 철필(鐵筆)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謄寫機)에 걸고 종이를 올려 놓고, 등사잉크를 묻힌 롤러(roller)를 밀면서 한장, 한장 씩 찍어 냈다. 이 때 사용된 종이는 요즘 프린터 용지같은 좋은 종이가 아니라 재생 종이인 누른 빛의 갱지(更紙)를 사용했다.
요새는 초등학생들도 PC의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여 여러가지 글자체로 글을 써서 쉽고 자유롭게 프린터로 인쇄하지만 그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 ※등사 원지(謄寫原紙) : 등사판
그 당시에는 서기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檀紀)연호를 썼다.
단기 4285 년은 서기 1952 년이다.(단기 년도 - 2333 = 서기년도 )
한국전쟁 ( 6.25 ) 이 일어난 때는 1950 년, 6 월 25 일(일요일)이다.
1950년대의 국민학교 성적표
청계국민학교 졸업 앨범
단기 (檀紀 )4291年 < 서기(西紀 )1958年>
청계국민학교 교사(校舍) 사진과 교가(校歌)악보, 가사가 게재되어 있다
위 사진의 동그라미안은 나 (김현무)이며 국민학교 졸업사진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
위의 모든 것 (졸업앨범 1점, 성적표 6점, 상장 26점등), 모두 33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2013년 5월 2일에 기증하였다.
[ 이 기증품들은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지는 않고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다.]
2014년 기증자 명패 제막식
2014년 기증자 명패제막식에서 박물관장으로 부터 기증증서를 받고 있는 모습
아래는 서울역사박물관 1층벽에 설치 되어 있는 기증자 명패
2014년 10월 8일에는 1985년에 사용되던 UN 팔각성냥
3점을 기증하였다.
2015년 기증자 명패 제막식에 참석하는 본인에게 박물관 직원이 꽃송이를 꽂아 주고, 명찰을 달아 주고 있다.
1950 년대의 청계국민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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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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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청계초등학교(이하 청계국민학교로 표기) 48회 졸업생인 이상억 교수가 올해로 건립 110년을 맞는 현 동국제강 본사 사옥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이번 호에는 청계국민학교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고,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당시 주변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 소개한다. |
청계국민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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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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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교 청계국민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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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국민학교 나왔냐?” 내가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하는 얘기다. 나는 서울 중구 광교 뒤편, 현재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청계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현재 동국제강 본사가 들어서 있고, 일부 리모델딩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그대로 있어 그 당시 내가 다녔던 건물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학교가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인쇄소, 패션거리(명동)로 둘러 쌓여 있어 면학분위기가 조성이 안되었고, 주택이 드물어 내가 5학년이던 당시 남대문, 인현, 수송, 방산국민학교 등과 더불어 폐교가 되었다. 그때 우리 학교 전교학생수는 680명으로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미동국민학교는 10,000명이 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2부제 수업을 하는 것과는 확실히 비교되었다. 나는 졸지에 집(중구 장교동)과 가까운 남산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얼마 있다가 아현동으로 집이 이사 가는 바람에 1년 후 아현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 2명 청계국민학교 동기들을 만났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5년 동안 사귄 그 많은 친구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졸업앨범이 없어 무척 안타깝다. 어디선가 글을 읽다 보니 소설가 마광수교수가 청계국민학교 출신이라고 하여 마치 잃어버린 동문을 찾는 듯 기분이 좋았다. 내가 청계국민학교에 다니던 기억을 되새겨 본다. 청계천 인근 판자집에 살던 나는 책가방을 살 형편이 못되어 책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춤에 매고 한동안 학교에 다녔는데, 을지로 입구 적산가옥에 살던 부잣집 친구들은 통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어깨에 매고 다녀 나는 서울에 올라온 시골촌놈 같아 창피해서 학교 가기가 싫다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또다시 펴서 손뼉 치고, 두 손을 머리에…. “ 피아노를 잘 치는 손가락을 몇일까? 우리 모두 다같이 세어봅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모두 열이다” “섬집 아기, 초록빛 바다, 고향땅, 과꽃” 등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따라 부르던 수십 곡이 넘는 동요는 40년도 훌쩍 지난 지금도 입가에 맴돈다. 나는 고학년이 되어 도시락을 싸오기 싫을 때 종종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가게에서 하얀 크림이 들어있는 삼립빵을 사서 친구와 미끄럼틀에 올라 운동장을 내려다 보면서 먹었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며 갈증을 해소하였다.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가 드디어 폐교하던 날 아침, 폐교를 알리던 할아버지 같은 교장선생님은 검은 안경을 벗으며 연실 눈물을 훔쳤고, 우리 모두는 선생님, 학생 할 것 없이 부둥켜 안고 울었다. 결국 그 교장선생님은 내가 전학했던, 남산국민학교에 교장선생님으로 다시 오셔서 얼마나 기뻤던가! 그 당시 나는 이사간 아현동에서 명동에 있는 남산국민학교까지 두어달 버스를 타고 다녔 는데, 만원버스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학교에 도착 후에도 몸이 욱신거려 수업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을지로 입구를 지나면 일부러 내가 공부했던 청계국민학교(現동국제강 본사)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우리 집이었던 브랭땅 백화점 자리(장교동)까지 과거를 상상하며 천천히 걸어보기도 한다. 청계국민학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삼화인쇄소가 나오고, 대로변 큰길을 왼쪽으로 돌면 건너편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웅장한 내무부건물(現외환은행 본점)을 쳐다본다. ‘땡땡’ 거리는 전차를 바라보며 100여미터 걷다가 좁은 인쇄소 골목으로 들어오면 그 한쪽 에 있던 낡은 삼일아파트 옆이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위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늦가을이면 지붕 위에 올라 은행나무를 돌로 치며 흔들어 은행이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였다. 아현동으로 이사간 후 학창시절 몇번 내가 살던 장교동을 가보았는데, 지금은 상전벽해되어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다. |
건물, 무너지다
위 사진은 우리 회사 건물 뒤쪽, 그러니깐 청계천을 가는 길목에 있던 동국제강 본사 건물이다.
굳이 허물고 있는 남의 회사 건물을 찍은 이유는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이다.
저 건물은 ㄱ자형으로 된 3층짜리 건물이다. 보시다시피 건물 앞에는 널찍한 앞마당도 있다. 허물기 전까지는 잔디밭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회사 사옥 치고는 정말 특이한 녀석이라서 관심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원래는 청계국민학교 건물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납득하였다.
사무실의 화장실 입구 쪽에서 보이는 건물이라 양치질을 할 때마다 창가에 서서 바라보곤 하였다.
내심 저런 건물에서 일하는 것도 참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건물도 별로 높지 않고 마당도 널찍하니 가끔씩 쉬러 나오기도 좋고...
소문을 듣자하니 주인이 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층 주상복합 빌딩을 지을 계획이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고 싶은 욕심에 자기 건물 부수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오래된 학교 건물이라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데다, 삭막한 도심 속에 신선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시스코 본사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워낙 땅이 넓은 동네라 그런지 대부분의 건물이 1,2층이고, 서로 널찍널찍 떨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 부러운 환경이었다.
혹시 운이 좋아서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성공을 거둔다면... 회사 직원들에게 그런 공간을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매일 사진의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되새기곤 했는데, 이젠 그럴만한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인데, 지금은 완전히 다 허물어서 무너진 돌더미만 남아있다. 좀 있으면 돌더미도 다 없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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