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3성 조선족

“해란강닷컴” 개국

아람누리 2013. 9. 7. 12:36

 

 

 

 

해란강닷컴개국에 즈음하여

 

김 관 웅(연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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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닷컴의 출범에 즈음하여 광범한 네티즌들과 해란강에 대해 말을 할수 있게 된것을 나는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해란강()은 도문강수계(图们江水系)의 한 지류이다.

해란강은 화룡시 증봉산(甄峰山) 동북쪽의 협곡에서 발원하여 화룡시 경내를 흘러 지나가면서 장인강(匠人河), 복동하(福洞河), 륙도하(六道河), 팔도하(八道河) 등 지류들과 합류한 뒤에 연길시 장백향 하룡촌에 이르서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와 합류한다. 해란강은 전체 길이가 145km이고 류역의 면적은 2934평방킬로메터에 달한다. 해란강은 량안의 비옥한 땅을 적셔주면서 이 류역의 모든 생령들에게 무진장한 생명수를 공급하여 준다. 이리하여 해란강은 루루 수천년 동안 많은 민족의 문화를 키워준 어머니의 젖줄기 같은 강으로 사람들의 머리속에 각인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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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란강과 여진, 만족문화의 오랜 인연

해란강의 흐름을 따라서 중류로부터 펼쳐진 화룡시 경내의 60리 평강벌(平原) 하류에서 펼쳐진 룡정시 경내의 서전벌(瑞甸平原)에는 어디를 가나 느릅나무(榆树, 연변 조선족의 방언에서는 느릅나무를 비슬나무라고 함)들이 무성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해란강은 녀진어와 만어의 느릅나무를 뜻하는 “해란”이라는 나무이름에서 유래되였던것이다.중국의 력사문헌들에 따르면 이“해란()”은 《금사(金史)》같은데서는“허란(), 《원사(元史)》같은데서는“허란()”등으로 다소 다른 한자로 기록되기도 하였지만 모두 그 음은 비슷하며 따라서 이 느릅나무(榆树)라는 나무이름에서 유래되였음은 아주 분명하게 알수 있다.지금도 해란강류역의 룡정시 덕신향 같은 고장에 가면 아름드리 느릅나무들을 도처에서 볼수 있다.

고구려, 발해,료나라,금나라, 원나라 그리고 명나라 초기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속에 있어서 해란강을 포함한 전반 두만강류역은 말갈 그리고 그 후예들인 녀진인들의 삶의 터전이였다. 이 땅에는 주로 그네들이 살아왔으므로 해란강을 포함한 두만강류역의 수많은 하천이나 산이나 봉우리나 고장의 이름들이 모두 그네들의 언어로 지어진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란강류역에는 이런 하천의 이름과 같은데만 아니라 그네들이 살았던 력사의 유적지들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화룡 서고성은 중원의 당왕조와 오래동안 병존하여 왔던, 당시 세인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발해국(渤海)의 도읍지 중경현덕부(中京德府)가 자리잡고 있었던 고장이기도 하다.이 중경현덕부는 기원 734년부터 755년까지 발해의 수도였고, 그뒤 상경룡천부(지금의 녕안 동경성 발해진)로 천도한 뒤에도 로주(), 현주(), 철주(), 영주(), 흥주() 등 여섯개 주를 관할했다. 그중 로주는 지금의 해란강류역의 평강벌이나 서전벌에 해단된다고 사료되는데, 발해 시기에 이미 “로주의 벼(州之稻)[①]라고 하여 중원에까지 그 소문이 자자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는 농경문화는 이미 천년도 훨씬 넘는 머나먼 발해시절에 이미 해란강 류역에서 꽃을 활짝 피웠음을 잘 알수 있다.

료나라 거란인들의 철기에 의해 망국의 비운을 맞은 발해인들은 오래동안 그네들의 유린을 당하면서 설음을 안고 살아왔다. 그중에는 바로 후일 녀진인들의 선조였던 완안부락의 녀진인들이 해란강을 포함한 드넓은 두만강 유역과 조선반도의 동북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반도 력사에서의 후삼국시대의 말기나 혹은 고려 건국 초기에 평주(지금의 조선 황해도 평산 일대)에서 살고있던 함보(函普)와 그의 동생 보활리(保活里)는 궁한촌(村,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던 완안() 녀진부락에 몸을 의탁하고 녀진 녀자한테 장가 들어 살다가 나중에는 완안녀진의 두령이 된다. 이 고려에서 온 함보가 바로 금나라 황실의 조상이다.후일에 함보는 다시 완안부락과 함께 북으로 이동하여 두만강상류의 회령 일대를 거쳐서 부르하통하와 해란강류역에 자리를 잡고 완안부락을 감히 강대한 료나라와 맞서고 종당에는 료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아가서는 북송까지 멸망시키고는 중원에 군림할수 있는 강대한 대금제국(大金帝)으로 성장할수 있도록 그 초석을 굳게 다진다. 이런 의미에서 해란강 류역을 포함한 연변 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금나라의 흥룡지지(兴龙之地)였다.

금나라의 조상들을 이어서 다시 한번 중국의 통치자로 군림했던 청나라 황실의 조상들이였던 오도리(斡多里)부락과 올량합()부락의 녀진인들 역시 해란강을 포함한 두만강류역에서 웅비의 날개를 가다듬었으니 해란강을 포함한 연변지역은 역시 녀진인들의 흥룡지지(兴龙之地)였다.올량합부락과 오도리부락은 바로 15세기 초에 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에 오랑캐 령을 사이두고 사이 좋게 살아갔으며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두만강 기슭에는 아마도 말 달리며 사냥을 하던 녀진인들의 말밥굽이 무수히 찍혀 있었을것이다.바로 이 두 녀진부락은 15세기 초반에 선후로 이 고장을 떠나서 료동으로 이동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하고 천하에 군림할수 있는 기회를 잡을수 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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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이민들의 삶의 보금자리 해란강

녀진부락들 사이의 내분을 틈 탄 조선왕조 세종대왕의 동북면 경략으로 인해 오도리부락은 전면적으로 후퇴를 하여 두만강을 넘어오게 된다. 이 승세를 타서 조선조의 명군(名君) 세종의 충신이였던 김종서가 지금의 두만강 우안(右岸)에 조선 함경북도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6진을 개척하고 조선반도 남부에서 백성을 옮겨와 녀진인들이 떠나간 자리를 채운다.

그 뒤로 명나라와 조선은 료동으로 이동해 간 건주녀진(즉 오도리부락과 올량합부락)을 협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히기는 했지만 그 뿌리는 뽑아버리지 못한다. 그 뒤 16세기 말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모두 기력이 쇠진해진 틈을 타서 녀진족의 걸출한 수령 누르하치가 중국 동북지역의 많은 녀진부락을 통일하고 나중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전 중국에 군림한다. 청나라의 강희황제 때부터 청나라 조정에서는 연변지역을 포함한 장백산 지역의 많은 고장을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리유로 봉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해란강류역을 포함한 연변은 수백년동안 거의 인적이 없는 고장으로 되여버린다.

  19세기 60년대 이후인 청나라 말기에 접어들어서야 두만강 건너로부터 목숨을 내건 조선인들의 간도에로의 이민이 시작되며 이로부터 해랑강과 조선인이민들의 인연이 맺어지기 시작한다. 19세기 60년대로부터 두만강 류역 조선 함경북도의 조선농민들은 청나라조정의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 경내에 들어와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거나 심지어 가만히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위만시기 만주조선인문학의 기수였던 안수길의 장편소설 《북간도》에 따르면 간도(间岛)”이 지명은 두만강 사이의 섬을 한자로 옮기면서 만들어져 졌다가 한다. 두만강가의 종성에 사는 조선농민들이 둠나강을 건너서 중국 땅에서 가만히 농사를 하면서도 당시의 조선 관리들을 얼려 넘기기 위해 자기들은 두만강 복판에 있는 섬에 가서 농사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후에는 수많은 조선농민들이 모두 이렇게 둘러대는 바람에 나중에는 이 사이섬이라는 지명이 두만강 건너의 중국 땅을 두루 다 가리키는 지명으로 되여버렸다는것이다. 지금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구촌의 두만강 복판에 있는 모래섬이 바로 그 사이섬이라고 한다.

그 뒤에 중국 동북의 령토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침략야욕이 날로 가시화되여 가는 시점에서 청나라 조정에서는 중국의 국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조선이민들을 리용할수 밖에 없게 되였으며, 드디어 1881 2백년이나 지속되였던 봉금정책을 페지하고 두만강류역을 조선농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마치도 조수가 일기나 한듯이 조선 북부로부터 조선이민들은 괴나리보짐을 짊어지고 밀물 같이 두만강을 건너서 해한란강 류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두만강이 리별의 강으로 조선족 선조들의 머리속에 각인되였다면 해란강은 정착의 강으로 조선족의 머리속에 각인되였다.

해란강 상류와 중류류역은 조선 무산군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무산간도()”라고 불렀고, 해란강하류 류역은 회령, 종성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회령간도(间岛)” 혹은 종성간도(间岛)”라고 불렀다. 사실 북간도에서의 조선족의 민족 교육은 많이는 이 회령간도 혹은 김약연 같은 종성에서 건너온 조선인 이민들에 의해 추진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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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족 민족교육과 항일투쟁의 근거지해란강

반만년의 유구한 문화전통을 갖고있는 조선이민들은 집을 일떠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동시에 서당과 학교도 함께 꾸리기 시작하였다. 서당과 학교는 단순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손만대 이 새터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련다는 조선인 이민들의 투철한 정착의지를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1906년에 룡정에 설립된 서전서숙(瑞甸)이나 1908년 화룡현 달라자 명동촌에 살립된 명동학교(东学), 1907년 화룡현 광제욕(지금의 룡정시 광개향 광소촌)에 설립된 양정학당(), 1907년 연길현 국가자 와룡동에 설립된 창동사숙(私塾) 등은 바로 이 회령간도 혹은 종성간도의 조선인이민들을 주축으로 하였다. 바로 해란강의 지류인 륙도하 기슭의 선바위아래의 명동촌에서 태여나서 유서 깊은 명동학교와 룡정 대성중학에서 투철한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윤동주 같은 걸출한 시인이 나타나게 된것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이런 교육의 열기는 후일의 룡정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교육의 흥성기를 맞을수 있게 하였으며, 이런 수많은 조선족학교에서 양성된 학생들은 후일 연변에서의 항일투쟁과 민족문화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해란강류역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는 또한 투쟁의 강, 수난의 강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는 연변의 각지에 수많은 독립군부대들이 운집했고, 이들은 항일무장투쟁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었다.

룡정에서 1919 3 13일에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주역은 북간도의 조선인이민이였음을 두말할것도 없고, 김좌진이나 홍범도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독립군들이 해란강가에서 자라난 조선인 이민들이였음도 두말할것도 없다.

1920 6월 초 두만강기슭에서 벌어졌던 봉오동전투를 이어서 일제는 그 보복으로 훈춘사건과 경신참안을 일으켜 북간도 땅을 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다시 일제에 향해 설욕을 했던 것은 그 유명한 청산리대첩이였는데, 그 전장은 바로 해란강의 최상류의 협착한 골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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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이 한 물 가자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운동이 해란강 류역에서 홍수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령도에 의한 간도 조선족들의 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에 의한 항일투쟁으로 바뀌면서 그 투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차게 타올랐다. 1930년의 붉은 5월 투쟁”, “길돈폭동을 이어서 1931“9.18사변전후의 추수투쟁춘황투쟁을 거쳐서 해란강유역의 항일투쟁은 무장탈취, 항일유격대의 건립과 항일유격근거지의 건립 등으로 발전되여 간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해 거퍼 2,3년 사이에 1,7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연길현 해란강구 대참안은 전반 중국의 항일투쟁사에서도 가장 참혹한것이였다.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 김학철옹이 1954년에 펴낸 첫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바로 이 해란강참안을 포함한 연길현 해란강구 조선족인민대중의 항일혁명투쟁사를 아주 리얼하게 재현한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항일유격대문학의 원조인 셈이다.

해란강 류역을 주축으로 하는 간도는 당시 전반 조선반도의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젊은 시절 간도에서 항일투쟁에 몸을 던져 싸운 경력을 갖고 있는 조선인민의 수령인 김일성은 자신의 회곡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간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억을 한적 있다.

고학을 하려면 일본으로 가고, 흘레브를 먹으려면 쏘련으로 가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류행어는 동만을 광복운동의 최전방으로 보고 그곳을 끝없이 동경하던 당시 조선청년들의 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간도로 가는것은 화구앞으로 가는것과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을 더 본때 있게 하기 위하여 그 화구앞으로 주저없이 돌진하였다.”[②]

해란강 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도는 바로 이런 항일무장투쟁의 최전방이였기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일제의 총칼아래 수많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였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은1932 4월에 일어났던 간도혁명의 중요한 발원지의 소왕청에 대한 일제 토벌군에 만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바 있다.

토벌이 얼마나 잔학무도하고 광란적이였던지 왕청사람들은 그때 이런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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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자에서 반일전쟁 개막되였다

대포알은 앞뒤산에 들들 울리고

기관총과 류산탄은 비발같도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탄을 던져

무산대중 학살을 능사로 한다

대두천에 화염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재터뿐이다

무죄량민 주검은 들에 널리고

왕청들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만주땅에 살고있는 무산대중아

일치단결 일어나 싸워나가자

우리들은 끓는 피로 전쟁장에서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리라.

   소왕청과 대왕청 골안으로는 야수들의 토벌에 집을 잃고 혈육을 잃은 피난민들의 분류가 그칠새 없이 흘렀다. 일본의 비행기들은 일반주민들밖에 없는 그 인파를 향해서도 폭탄을 마구 던지였다.

수정같이 맑은 물은 왕청의 강물은 삽시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어떠 날은 그 강물로 학살된 사람들의 창자가 떠내려 가기도 하였다.”[③]

항일전쟁 시기에 해란강 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도지역에는 무려 3301명에 달하는 조선족항일렬사가 나타났는데, 이는 간도 항일렬사 총수의 96.8%을 차지한다. 이 렬사들 중에는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수천수만의 조선족대중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 당대의 저명한 시인 하경지(敬之)가 연변을 돌아보고는 산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솟아있다(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는 시구를 남겼던것도 바로 중국혁명에 기여한 연변조선족인민의 지대한 공헌에 대한 칭송이였던것이다.

개별적인 딴심보를 품은 문인들이 일송정아래엔 선구자가없었다고 허튼소리를 탕탕 내던지면서 일송정아래의 해란강 류역에서 피흘리면서 쓰러진 수천수만의 혁명선렬들을 모독하기는 했지만 력사는 결코 이런 한두마디의 망언에 의해 불식되는 법은 없다.

 

 

 

위민주국시절 만주조선인시문학의 중요한 멤버였던 윤해영의 작사로 된《선구자의 노래》에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오늘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고 했듯이 해란강은 지금도30여 성상에 걸치는 우리 연변조선족의 피어린 항일투쟁의 력사를 말하면서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처럼 해란강은 연변조선족인민들의 수십년간에 걸친 피어린 항일투쟁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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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족인민들의 애환을 담고 흐르는 해란강

해방후 해란강은 처음에는 조선족의 새로운 삶의 기쁨과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쁨을 담고 흘렀다.

토지를 분여받은 번신한 해란벌의 조선족들은 선참으로 호조를 조직하고 초급사를 꾸리고 고급사를 꾸렸다. 그 중에서도 연길현 동성용구의 영성촌의 김시룡(时龙)1952년에는 전국적으로 제일 처음으로 새벽집체농장을 조직하여 전 중국적으로도 몇손가락안에 꼽히는 사회주의 길로 나가는 농민의 선줄군으로 소문이 높지 않았던가.

 

 

1952년 가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창립에 즈음하여 지은 《연조선족자치주성립의 노래》는 다음과 연변인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춤을 춘다

에루와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민족자치구 세웠네

연변의 조선족시인들이 해란강도 노래하고/장백산도 춤을 춘다고 해란강에 대해 절절하게 감정이입을 한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도그럴것이 해란강은 조선족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같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란강에 대한 연변 조선족인민들의 이런 진지한 감정은 김경석이 지은 《고향 산기슭에서》의 노래말에서 잘 드러난다.

고향산기슭에 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유유히 해란강은 흘러가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아

아 사랑스런 고향아

조국의 변강이여

이 인구에 회자된 노래말에서 우리는 연변인민들의 해란강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단적으로 보아낼수 있다. 해란강은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의 상징이였다.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에 해란강은 연변의 상징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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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중에 전 중국에 널리 전파되였던 《연변인민 모주석을노래하네(人民热爱毛主席)에서도 해란강은 연변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 맘속의 붉은 태양 心中的
조국변강 비추네 照得疆一片
장백산아랜 붉은기 날리고 百千里歌嘹亮
해란강반엔 벼꽃 피네 江畔飞扬
천만송이 해바라기 江河大海

태양 따라 활짝 피고 葵花向阳开
연변인민 한맘으로 人民情歌唱
모주석을 노래하네 心中的
……모주석 ……毛主席

  연변조선족은 이처럼 벼꽃 향기 풍기는 해란강을 자기의 어머니 강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한 세기 이상 이 땅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조선족민중들속에는 새로운 해란강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중국조선족 민간문학의 개척자인 정길운 선생이 1950년대에 수집, 정리한《해란강》전설은 또한 얼마나 랑만적이고 아름다운가.

머나먼 옛날 해란강 량안의 벽암산(碧岩山)과 주암산(珠岩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강을 사이둔 두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해란강에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해란강을 목숨처럼 여겼다. 주암산 아래의 마을에는 해()라는 총각이 살고, 벽암산 아래의 마음에는 란()이라는 처녀가 살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일터에서 서로 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한 악마가 나타나서 이 두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을 마구 짓밟자 용감한 해()가 나서서 격투를 벌이다가 해가 검으로 악마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순간에 란()이 버치에 재를 담아 그 머리와 모가지에 뿌리는 바람에 악마의 머리는 다시 모가지에 달라붙을수가 없게 되여 죽어버리게 된다. 악마를 퇴치한 후에 해란강은 다시 맑아지고 고기와 새우들도 다시 번성하여 두 마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이두 총각과 처녀도 부부로 되여 백년해로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총각과 처녀의 공적을 후손만대에 전하고자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서 해란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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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전설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연변의 유명한 작곡가 정진옥과 시인 최정연의 노래말로 된 《처녀의 노래》는 또한 얼마나 멋드러지고 흥을 돋구는가.

해란강 사이 두고

풍년가 우렁찬데

저쪽에는 총각이 살고

이쪽에는 처녀가 산다나요

   부지런한 두 사람은 일터에서 정이 들어

만나며는 반가웁게 이야기를 한다나요

……

지난 가을 자치주 창립 60돐 기념축제에서 울려퍼진 이 노래는 수많은 관객의 가슴을 설렁거리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바람이 몰아친 이후로 연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해란강 량안의 황페해가는 조선족 농촌마을들을 둘러볼 때마다 하애달픈 가슴을 쥐여 뜯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향이 화룡 와룡향인 연변의 수필가 리태근 씨는《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에서 사라져 가는 고향의 초혼곡을 애타게 부르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런 초혼곡은 사실은 더욱 고향을 악착같이 지키고 고향에서 계속 악착같이 살아가겠다는 넋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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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해란강에 대한 사랑과 고향에 대한 사랑이 죽지 않은 이상 해란강류역의 조선족의 삶의 보금자리는 반드시 전부 다 사라지지는 않고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을수 있을것이라고 확신해 마지 않는다
.

 

중국조선족의 가장 중요한 인터넷사이트로 부상하게 될 해란강닷컴이 해란강이라는 이 거룩한 어머니 강의 이름을 달고 출범하게 된다. 미상불 좋은 이름을 달았다. “명정언순(名正言)”이라고 이름이 바르면 그 말씀도 바르고 순탄해지는 법이다.

   나는 오늘 출범한 해란강닷컴이 연변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조선족과 울고 웃으면서 중국조선족문화를 이 세상의 만방(万邦)에 널리 홍보하는 제일류의 인터넷매체로 성장할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 조선족의 어머니 강 해란강처럼 천년 두고 흘러 흐르는 영원한 흐름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2013 9 2일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