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중국

작은 중국 ‘인천차이나타운’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아람누리 2012. 9. 6. 20:55

 

 

작은 중국 ‘인천차이나타운’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국립민속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淸館)’ 도시민속조사보고서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문화’를 조사·정리한

보고서 ‘인천 차이나

타운 청관(淸館)’,

‘왕조용·김미라 가족

의 살림살이’ 2권을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국립민속

박물관이 서울 아현동(2007년)을 시작으로

진행하고 있는 도시  민속조사사업의 결과물로, 서울 정릉3동(2008년), 울산 달동(2009년), 전남목포(2010)에 이어 발간한 것이다.
특히 급속히 이행되고 있는 다문화 현장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차이나타운의 민속지‘인천 차이나타운 청관(淸館)’은 1883년 처음 인천에 들어온

 청나라 상인을 시작으로 중국인으로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온 인천 화교들

의 다양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수록했다.


 

■ 민족적 차별 속에 성장한 인천 차이나타운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조선정부의 참전 요청에 의해 리홍장(李鴻章 1823.2.15
~1901.11.7)의 군대가 인천에 주둔했다. 이때 함께 따라온 상공화교(商工華僑) 40명이 한국에 온 첫 화교이다. 이후 꾸준히 화교인구가 유입됐는데 이들 대부분은

산둥성 출신이었으며 채소농사,이발사, 재단사, 요리사 등으로 생업을 이어갔다.
이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짱깨’, ‘짱꼴라’라는 말을 듣는 등 민족적 차별을 받으며

살아 왔다. 또한 한국정부의 화교정책에 따라 부침을 겪으며 살아왔다. 산둥성이

고향이고 본적이나 한국전쟁이후 한중관계 악화로 본적지를 버리고 타이완의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는 곳은 인천이다. 1950년대에는 창고봉쇄조치로 무역업을

실상 포기하게 되었으며, 1997년까지 이어진 부동산규제 정책으로 일정수준

이상의 점포와 농토를 소유할 수 없었다.
1961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로 채소농사를 하던 농토, 음식점을 운영하던 점포

를 본인명의로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거나 한국인 부인

의 명의로 재산등록했으나 사기로 재산을 잃은 경우도 있다. 1968년에는 1961년

의 금지에서 완화되어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 이내의 토지의 취득허락을 받았다.
인천 ‘차이나타운(또는 청관(淸館))’은 인천의 복성동과 신포동 일대의 화교 촌이다. 화교(華僑)라는 용어는 청나라와 조선이 교환한 문서에 따르면‘청조인(淸朝人)’,‘화인(華人)’,‘청상(淸商)’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용어가 등장한 것은 청나라 말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교(華僑)’는 한자어의 의미로 외국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칭한다. 인천 차

이나타운 일대의 면적은 30만 평방미터이며 화교인구는 3백 가구 약 1천명이 살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타이완 국적이 90%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1884년

이후부터 한중수교 이전까지 유입된 화교의 후손들이다.


■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이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에는 의례 공간, 상업용 공간, 교육공간이 자리 잡아 작은 중국을

연상케 한다.
의례공간에는 화교들의 민간신앙인 의선당이라는 전통묘우가 있다. 특히 춘절이

면 많은 화교들이 이곳에서 제례를 올린다. 묘우명 의선당은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겠다’는 뜻을 가졌다. 의선당에 모셔진 신과 선은 모두 다섯 분이다. 이 신선들

은 모두 중국과 타이완에서 추앙받는 신선들이다. 묘우 정진 내부 왼쪽부터

호삼태야, 사해용왕, 관음보살, 관우, 마조신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인천

부평공동묘지와 육미리 화교공원 묘지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는데 모두 합해 화교학교라 부른다. 이 화교학교는 옛 청국 영사관 터에 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은 짜장면 거리가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짜장면은 중국음식의 대표음식으로 그 시작은 인천이라는 게 정설

이다. 이러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청요리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화춘과 중화루가 대표적이다. 공화춘은 30년 가까이 폐가로 방치하다가

‘짜장면박물관’으로 바뀌었고 중화루는 건물은 헐려 터만 남아 있고 그 이름만

물려받아

신포동에서 새로 운영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에 가면은 중국인들의 세시풍속은 물론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어 중국을 보려면 인천차이나타운에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인천 중국거리문화축제-중국의 날 문화축제는 한중수교 10주년을 맞아 차이나타운의 활성화, 양국의 우호 증진 그리고, 인천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기념하기 위해 2002년부터 열렸다

■ ‘왕조용 · 김미라

가족의 살림살이’ 를

통해 본 화교생활
한편 보고서에서는 화

교가정의 살림살이를

조사한 ‘왕조용·김미라 가족의 살림살이’는 화교 아빠와 한국인 엄마, 화교학교에 다니는

자녀로 구성된 가정을 선정하여 그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살림살이를 기록하고, 그 물건들을 통하여 현재 화교가정의 생활모습을 기록했다.
한국사회에서‘다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현실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문화의 부정적인 요인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포용하여 연대감을 증대시키는 공동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건전한 다문화사회로 가는 최선의 길이라면, 이번 국립민속박물관의 다문화 조사는 그 기초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첫 단추를 꿰었다고 할 수 있다.
화교는 한국에 들어온 가장 오랜 타문화인 동시에 한국과 중국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이 한국문화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 왔고, 한국사회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를 고찰한 이번 조사를 토대로 또 다른 문화를 포용하는 방법을 찾는데 의의가 있다.
화교를 이르는 한자어 ‘화교(華僑)’가 최근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는 ‘화교(華橋)’로 쓰이는 의미를 되새겨 볼만 하다.


                                                                이사랑기자 drace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