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교 하류에서 본 비우당교. 庇雨堂은 비를 근근히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 초, 3 대 임금을 받든 정승, 유관이 이 곳에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어찌나 청빈한지 장마철마다 집에 비가 샜고, 그는 비가 새면 과거 급제 때 하사 받은 일산 ( 日傘 )을 펴들고 아내에게 " 일산 없는 집은 장마철을 어떻게 나나 "라고 물었다고 한다.
청계 빨래터.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있다.
과거 청계천은 아낙네의 빨래터이자, 아이들이 멱을 감는 놀이터였다.
다산교 下流의 징검다리에서 본 영도교.
영도교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떠날 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노산군과 이별을 하며 슬피 운 곳이 바로 영도교 다리라고 한다.
영도교 아래, 징검다리.
고종 때 대원군이 영도교를 헐고 그 석재를 경복궁 중수에 사용하는 등 ,수난을
많이 겪은 다리 이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황학교, 아래 돌은 징검다리가 아니고 여울이다.
위 사진의 여울을 찍은 것이다. 이 것이 징검다리가 아니라는 것은
돌과 돌 사이를 보통 걸음으로는 넘어 갈 수 없음으로도 알 수 있다.
건너 편 쪽에 여울이라고 쓴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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