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중국

중국의 4대 미녀 "서시" 이야기

아람누리 2013. 4. 10. 23:44

 

중국의 4대 미녀 "서시" 이야기

 

 

중국에는 ‘침어낙안, 폐월수화(沈魚落雁,閉月羞花)’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지금도 여자의 미모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말은 오로지

 중국 고대의 4대 미녀인 서시(西施), 왕소군, 초선과 양귀비를 가리킬 때만 쓰는

 말이다. 상술한 고사성어 중 ‘침어(沈魚)’가 바로 춘추전국 시대의 미녀 서시에게

서 유래됐다.


서시의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으로 춘추전국 시대 절강(浙江) 저라산(苧蘿山)

인근에 살았으며 땔나무 장사꾼의 딸이었다. 당시 저라산 아래에는 2개의 마을

이 있었는데 하나는 동촌(東村)이고 다른 하나는 서촌(西村)이라고 했다. 시이광

은 서촌에 살았으므로 서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서시가 당시 포양(浦陽) 강변에 놀러갔을 때다. 당시 물속의 물고기들은 피어오른

 연꽃과도 같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 헤엄치는 것도 잊고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서

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바로 ‘침어’다.


BC 494년,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다. 치욕을 참고

구차하게 살아남은 구천은 늘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오나라에게 복수를 꿈꿨다

. 구천은 재상 범려(范蠡)와 함께 호색가로 알려진 부차를 ‘미인계’로 유혹하기로

 했다. 그는 서시의 ‘침어’ 소문을 듣고 즉시 거금을 주고 서시를 데려오기로 했다.


서시는 곧 비단을 입고 호화스러운 마차를 탄 후 궁중으로 떠났다. 그러자 도중에

 그녀의 미모를 보려는 군중 수천수만이 몰려서 궁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나 더

걸렸다고 한다. 그녀를 본 경비병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할 정도였으며 범려가

구경꾼들에게 1전씩 내고 그녀를 보여 주자 그 돈이 산처럼 쌓여 병사를 훈련하는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천은 서시를 데리고 온 후 가무와 몸가짐을 가르쳤으며 꼬박 3년을 정성껏 가

르친 후에야 비로소 서시를 오나라에 바치게 했다.


오나라 왕 부차는 서시를 보자마자 “선녀가 인간 세상에 내려왔구나”라고 감탄

했다. 그러한 주군의 모습을 본 오나라의 맹장 오자서(伍子胥)는 충언을 고했다.

 “과거 은나라는 미녀 달기(妲己)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는 미녀 포사(褒姒) 때문

에 망했습니다. 미녀는 전부 망국의 산물이므로 대왕께서 서시를 받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부차는 이미 서시에게 흠뻑 빠져 오자서의 충언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서시를 얻는 부차는 온종일 그녀의 미색에 빠져있었다. 부차는 ‘춘소궁(春宵宮)

’이란 궁전을 짓고 밤마다 그곳에서 서시와 지냈다. 서시가 나막신을 신고 가는

 허리를 이용해 나풀나풀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차는 취한 듯 헤어나올

수 없었다. 부차는 결국 서서히 국정을 방치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서시의 꾐에

 빠져 맹장 오자서를 자결하게 했다. 결국 월나라는 이 틈을 이용해 마침내 오나

라를 멸망시키고 복수에 성공하게 되며 부차는 국경으로 쫒겨가 오자서를 믿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자결하게 된다.


서시의 타고난 미색은 결국 조국의 복수를 도왔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완성한

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이후 일부 사람들은 서시가 범려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지만 이후 서시의 행방이 어떠한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시에는 서시의 사원인 ‘서시전(西施殿)’이 있어

서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