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중국

중국의 4대 발명

아람누리 2013. 3. 27. 13:07

 

 

중국의 4대 발명

1. 인쇄술

 

                                                                         February 17, 2013

지난 2008년 개최된 다보스 포럼에서는 향후 15년간 인류에 대변혁을 가져올 현상들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이 포럼에서 한 미래학자는 향후 수 십 년 안에 종이에 인쇄된 형태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소설을 막론한 다양한 종류의 편리한 매체들이 개발되어 정보습득의 필요성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012년을 기해 인쇄판 발행을 중단한 미국의 저명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의 사례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비디오와 카세트테이프가 홀연히 사라졌듯 인쇄술의 시대 또한 어쩌면 곧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단순히 기억에 의존해 지식을 전하던 틀을 깨고, 인쇄술을 통해 쉽고 빠르게 보다 널리 지식을 저장하고 운반할 혁신을 이뤘다는 점을 아로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당연한 편리함 중 하나인 인쇄술의 발현과정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종이와 묵의 발명에 기초해 발전한 고대 인쇄술은 크게 조판인쇄술과 활자인쇄술 두 가지로 나뉜다. 수당 시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 조판인쇄술은 고대 돌이나 도장에 글을 새기는 석각(石刻) 방식에 기원을 둔다. 이것은 목판에 좌우가 뒤바뀐 문자를 양각(陽刻)하여 그 위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덮어 탁본하는 방법이다.


조판인쇄술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판인쇄물은 당나라 함통(咸通) 9년(868)에 인쇄된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으로, 글자의 조각기술이나 인쇄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아 당나라 때 조판인쇄술이 이미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조판인쇄술이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6~751경)은 이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있다.

이러한 조판인쇄술은 조판인쇄술은 보통 수백에서 수 천 권까지 인쇄가 가능하여 문화전파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책을 인쇄하는 데 수년씩을 걸리고, 인쇄판은 보관 공간을 많이 차지했다. 또한 쉽게 형태가 변하고 부식되어 꾸준한 관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쇄할 양이 적고 중요한 책이 아닌 인쇄판은 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판인쇄술의 여러 불편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활자인쇄술이다.


활자인쇄술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평민 출신인 필승(畢昇)이 발명한 활자인쇄술은 조판인쇄술의 불편함을 개선하고 보완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인쇄술이다. 그가 발명한 활자인쇄술의 원리는 먼저 점토 위에 활자를 반대로 새긴 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다음 활자판을 만들어 그 위에 배열하고, 활자판 위로 접착 성분의 밀랍을 발라 고정해 인쇄하는 것이다.

활자인쇄술은 조판의 결점을 정확히 보완해 주었다. 충분한 낱개의 활자만 준비되어 있다면, 쉽게 활자를 조합하여 언제나 빠르게 인쇄판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다른 내용을 인쇄할 때는 기존 활자판의 활자를 떼어내고 재배치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어서 실용적이고, 보관도 용이했다.

이후 활자인쇄술은 계속 발전하여 목판활자가 발명되었다. 원나라 때 왕정(王禎)은 운(韻)에 따라 목판활자를 체계적으로 배열해 필요한 활자를 아주 편리하게 찾아낼 수 있게 한 '회전자판법'을 발명함으로써 인쇄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활자인쇄술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또 실크로드를 거쳐 이란과 이집트를 비롯한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중국의 인쇄술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있다. 현대 과학기술에 밀려 인쇄술이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인쇄술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인류의 위대한 유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나침반

                                                                                       February 17, 2013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아마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일 것이다. 이 시기 서양은 돛과 나침반의 힘을 빌려서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원거리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 교역 요충지를 개발했으며 이를 위해 무력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서양의 경제를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서양경제에 큰 이윤을 선물했다. 이쯤 되면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서양 경제의 풍요로움은 중국의 나침반에서 비롯되어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남침(指南針, 나침반)이 정확히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전설 시기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전쟁을 벌일 당시, 안개 속에서도 사방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치우를 무찔렀다는 고사(故事)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남침의 ‘지남(指南)’이라는 단어는 후한(後漢)의 저명한 과학자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赋)에서 처음 사용되어 지남차를 제작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제작방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당시 유명한 과학자인 심괄(沈括)이 그의 저서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나침반의 발전과정, 유형과 원리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기록을 살펴보면 생산과 과학실험의 발전, 특히 항해와 무역이 발달하면서 나침반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나침반이 전적으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음도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자편각(磁偏角)인데, 이로 인해 나침반의 방향을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정화(鄭和)

나침반의 발명은 군사, 일상생활, 지형 측량뿐만 아니라 항해에도 응용되었다. 주욱(朱彧)의 평주가담(萍州可談)에서는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고, 흐린 날에는 나침반으로 항해하였다(夜则观星, 昼则观日, 隐晦观指南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나침반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원나라 때에 들어 비로소 나침반은 항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초(初), 항해사 정화(鄭和)는 1492년 콜럼버스(Columbus)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1497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서해안에 도착한 것보다 반세기 앞서 서양을 항해했다. 그는 7차례나 원거리 항해를 하여 이를 칠하서양(七下西洋)이라고도 한다. 그 조직과 인원이 28000여 명에 달해, 선박의 건조와 항해 기술은 매우 선진적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의 항해는 중국의 대외무역량을 증가시켰고, 동서양의 경제와 문화교류를 촉진시켜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드높였으며 세계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침반은 약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아랍을 통해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나침반은 유럽에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의 나침반으로 발전하여 일본을 통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서양으로 전해진 나침반은 서양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마젤란의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 항해에 이르기까지 나침반은 세계 경제무역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나침반의 바늘 끝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동양으로 향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지금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해 말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가 국가 전략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하는 정책의 대전환을 꾀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 이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간 상호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져, 평화와 안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3. 화약

                                                                                          March 25, 2013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절이 다가오면 중국의 밤 하늘은 수천 발의 폭죽으로 수 놓아진다. 중국인들의 새해맞이 풍습 중 하나인 폭죽놀이는 춘절기간 중 도심 곳곳을 불야성으로 만들고, 밤새 계속되는 폭죽 소리는 시민들의 밤잠까지 설치게 만든다.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터뜨리기 시작한 폭죽은 이제 새해 분위기를 더해주는 일종의 놀이가 되었다. 지금처럼 놀이문화로 발전된 폭죽의 기술, 그 밑바탕에는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인 화약의 공이 혁혁하다.



고대 화약의 발명은 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진(魏晉)시대의 연단술사들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을 만들기 위해 수 많은 화학약품으로 실험을 거듭했다. 이러한 연단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화약의 발명과 연관성이 있는 화법연단(火法煉丹)이다. 화법연단은 물 없이 가열을 하는 방법으로 위진(魏晉)시대의 도교학자 갈홍(葛洪)의 책 『포박자(抱朴子)』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연달술사들의 노력은 불로장생의 약의 만드는 데 쏠려있어 화약의 발명에 이르기까지는 ‘우연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이 우연은 연단술사들이 질산칼륨과 유황 그리고 숯이라는 세 가지 물질을 혼합하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 세 가지 물질이 한 데 모이면 폭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병을 치료하는 약물로 여겨 '불이 붙는 약'이라는 의미로 '화약(火藥)'이라 이름 붙였다. 또한, 당나라 초기 의술가인 손사막(孫思邈)은 『단경내복유황법(丹經內伏硫黃法)』에서 질산칼륨과 유황 그리고 숯을 혼합하여 불을 붙이면 강력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약을 제조하고자 했을 뿐, 이것이 화약 제조의 배합 방법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화약이 전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과 송의 교체기에 이르러서다. 최초의 화약무기는 주로 화약의 연소(燃燒)성이 이용되었다. 1044년에 편찬된 증공량(曾公亮)의 군사병법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는 화약 무기의 제조 및 배합 방법을 자세히 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북송(北宋) 시기의 화약은 질산칼륨의 함량이 매우 낮아서 주로 적진을 불태우거나 연막을 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화약이 전통 화공전술 중에서도 방화 병기 범주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약 무기의 출현이 군사 역사상 커다란 혁명으로 바뀐 것은 화약의 주요 기능이 연소성에서 폭발성으로 넘어갔을 때이다. 화약의 성능이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이용한 무기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병기로는 강력한 폭발성 화약 무기인 벽력포(霹靂炮), 무쇠로 덮개를 만든 진천뢰(震天雷) 등이 있다. 아울러 손에 들고 사용할 수 있는 화통(火筒)으로는 대나무 통에 화약을 장전해서 발사하는 돌화창(突火槍)이 있다.
 
화약이 아랍을 통해 서양으로 전파된 것은 화약무기가 전쟁에서 사용된 후였다. 1234년 몽고가 금(金)을 멸망시킨 후, 그들은 금의 화약무기를 가져갔고 장인들을 대거 몽고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 후 화약은 천천히 서양으로 유입되어 아랍과 유럽 국가간의 장기전이 진행될 당시 유럽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전쟁을 통해 화약과 화약무기를 접하게 되었고 제조기술을 익혔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인들의 유럽 국가 간의 전쟁에서 화약과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은 세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당연하게 즐기는 불꽃놀이 속에는 옛 중국 선인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4. 종이

                                                                May 16, 2013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종이(紙)는 빼놓을 수 없는 발명일 것이다. 과거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대나무나 동물의 뼈를 이용해야 했다. 때문에 친구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기 위해서는 한 보따리의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챙겨야만 했다.

서기 105년 채륜(蔡倫)이 발명한 종이는 인류의 기록 작업에 대변혁을 가져다 주었다. 누구나 종이 위에 자신의 생각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이가 없었다면 과거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오늘날만큼 잘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대한 종이도 문명의 발전에 밀려 뒷전으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20세기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과거 종이에 기록하던 수많은 정보들은 모두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미래학자는 머지않아 종이가 사라질 것이라고도 말했다. 과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종이가 사라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에 앞서 종이의 역사를 파헤쳐보자.


갑골문(甲骨文)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중국의 문자 기록 역사를 살펴보면 약 3,500년 전 상은(商殷)나라 때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에 글자를 새긴 종정문(鐘鼎文)이 있었다.


죽간(竹簡)

춘추(春秋)시대에는 죽간(竹簡)이나 목판에다 글자를 기록하였고, 전한(前漢) 시대에 귀족들은 비단이나 부드럽고 얇은 천에 글을 기록했다. 죽간이나 비단 위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갑골에 비해서는 수월했다. 하지만 죽간은 무겁기 때문에 운반이 불편했고, 비단은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가볍고 실용적인 필기재료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리하여 초보적인 형태의 종이가 등장했는데, 전한(前漢) 시대에 대마(大麻)와 모시로 만든 파교지(灞橋紙)와 한대(漢代) 유적지에서 발굴된 종이 지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재질이 매우 좋지 않아 기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이에 궁정 기물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채륜(蔡倫)이 이전 제지술(製紙術)의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종이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함과 동시에 필사에 적합한 식물섬유의 종이를 제조해 냈다.


채륜(蔡倫)

그의 제지술(製紙術)은 기본적으로 원료를 분리하고 세척하여 펄프 형태로 빻아 편편한 판에다 고르게 펴서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현재 종이 제조법의 원시형태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지술은 끊임없이 개선되어 대나무 발을 이용해 펄프를 채취하는 방법으로까지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종이는 이렇듯 오랜 연구 끝에 탄생한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위에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종이는 사라질까?

서점에서 산 책 한 권과 인터넷에서 구매한 전자책의 느낌은 같을 수 없다. 아직까지 독서라는 행위는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에서 나는 냄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할 때 더 온전하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독서를 독서로서 온전히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종이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유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