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 (1453년)에 왜침(倭侵)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으로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로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壅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子)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
(官衙)건물이 있었으나 병화(兵火)등으로 소진 된 것을 1976년 부터 14동을 복원하였다.
옹성(壅城)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方形)으로 쌓은 작은 성.
치성(雉城)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성가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북문 옹성
북문
옥(獄)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 , 또는 원옥(圓獄)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 여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옥(獄)의 뒷편
풍화루(豊和樓)
풍화루는 고창읍성 연못 옆에 세운 2층 누각(樓閣)이다. 건물과 연못이 없어 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조사하여 1989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정면에 있는 현판은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화루라 하였다.
관청(官廳)
관청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廚房)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수령(守令)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하였는데 ,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2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작청(作廳) 마루
작청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廳舍)이다.
작청 전체 모습
고창 객사 모양지관 (高敞客舍 牟陽之館)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체(正堂)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 쪽 방(翼室)
은 조정(朝廷)에서 파견 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牟陽之館)의 " 모양 "은 예로 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牟陽城)이라 불러 온데서 비롯된 당호(堂號)이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 객사 전체 모습
동문(안쪽성문)
동문 ( 왼쪽 :옹성 / 오른쪽 : 성문 )
답성(踏城) 놀이 상 (像)
돌을 머리 위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에 따라 지금도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답성 놀이를 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고창읍성 동영상